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레사 Jan 20. 2022

익숙함의 유혹


지킬 것이 많아질수록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정치적 성향도 그렇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꽤나 진보적인 의견을 가진 나도 예외는 아니다. 가정을 이루고, 약간의 재산을 가지고 보니 여러 면에서 점점 보수적인 입장이 되어간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가는 걸 보면 대체 뭘 가졌다고 기득권같이 구는가 싶다. 심지어 가끔은 꼰대들이 뱉을만한 말들이 튀어나오기까지 하고... 웁스.


인정하기 싫었던 나의 이런 변화는 해외 이주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예전 같으면 즐겼을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일들, 이를테면 지도보기, 맛집 찾기, 장보기(나는 해외에 나가면 대형마트 가는 걸 좋아한다), 외국어로 소통하기 등과 같은 일들이 모두 귀찮게 여겨진다. 대신에 한국에서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던 장소, 자주 먹던 음식, 새벽 배송 시스템, 속 시원한 의사소통방식을 그대로 옮겨오고 싶다. 새로 찾고, 발견하고, 익숙해지는 과정을 건너뛰고 싶다. 하지만 건너뛰어서 제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결국 천천히 꾹꾹 밟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사람답게 살기 어려울 테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먹지도 않던 김치를 끼니마다 꺼내 먹는다거나, 한국산 커피우유를 쟁여놓고 마신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는 익숙한 것으로의 집착을 놓지 못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해외에 나와서 무슨 한식을 먹느냐며 빈정대었을 텐데. 이제는 비싸고 비싼 만큼 맛은 안 따라주는 한식당을 자꾸 찾는다. 진짜 한식이 먹고 싶다기보다는 내가 아는 메뉴가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이 더 크다. 일어로 '사바'가 뭔지 구글링 해본다거나, 로컬 식당에 가서 '나시 고렝'과 '미 고렝'의 차이를 물어보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건 아마도 여행과 생활의 온도차 일지도 모르겠다. 단기간 많은 것을 경험하고 가고 싶은 마음과 장기간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의 차이에서 오는 온도차. '사바'가 고등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기쁨과 '나시'는 밥이고 '미'는 면이라는 사실까지 왜 굳이 알아야 하느냐고 묻는 게으름의 차이 같은 것.


파도타기 하듯 변화를 즐긴다고 적었던 젊은 시절 나의 이력서가 생각난다. 바다수영은 하지도 못하면서 저런 자기소개글을 적었다. 파도타기는 해 본 적이 없었으나 변화를 즐겼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두렵지 않던 시절.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처음들에 심장이 뛰고, 무언갈 시작하는 일 또한 잦았던 시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달라졌듯 그때의 시작과 지금의 시작도 달라졌다. 그때의 시작이 기쁨이었다면, 오늘의 시작은 게으름이랄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 지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일의 시작은 기쁜 게으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희망을 걸어본다. 결국 모든 시작은 익숙함으로 지워지게 되어 있으니,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것도 방법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싱가포르에서의 연말연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