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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Feb 15. 2022

사랑을 나누는 소리에 뒤척이는 밤

벽을 넘어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1107호의 그녀는 쾌락에 젖어있는 듯하다. 그래, 좋을 때다. 그럴 수 있지. 사랑하는데 어쩌겠어? 사랑은 아름다운 것... 그렇게 좋은 마음을 먹고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나도 모르게 귀가 자꾸 그 소리를 따라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적으로 너무 시끄럽다. 사방이 고요한 시간인 데다가, 저들의 사랑은 유난히 격렬하다. 무시가 불가능한 사랑의 소리여! 점점 더 거칠어지는 신음이여! 끝내 내지르는 비명이여! 마침내, 클라이맥스인가. 다시 시계를 확인한다. 새벽 1시 42분. 오래도 했다. 그들은 이제 지쳐 잠들겠지. 내 정신을 이리 말짱하게 만들어 놓고.


말짱한 정신으로 이 생각, 저 궁리, 이 염려, 저 고민을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흥, 아흥, 아흥. 망할 또 그 소리가 들려온다. 하, 꿈속에서도 이 소리가 들릴 줄이야. 내 성욕이 감퇴하는 불쾌한 소리! 가만, 근데 뭐지? 이 생생한 현실감은?.... 설마? 새벽 5시 22분, 싱가포르. 내가 있는 곳은 현실세계다. 놀랍게도 저 커플은 다시 한번 더 사랑을 나누고 있다!!!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의 한 서비스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집을 구하는 동안 잠시 머물기로 한 것이 한 달 반이 넘어간다. 이곳 생활도 적응이 되니 살만하기는 한데, 우리 집 가구며 살림들이 없으니 정 붙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이제 다음 주면 아파트로 이사하니, 거기에서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살 수 있겠지. 곧 만나게 될 우리 짐들이 벌써 반갑다. 특히 냄비. 내가 냄비를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냄비도 냄비지만 난 나의 숙면을 위해 이곳을 하루빨리 나가고 싶다.


서비스 아파트에는 우리처럼   이상 머무는 투숙객들도 있고, 하루 이틀 묵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떠나거나 남겨지는.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1107 투숙객의 존재는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들이 이곳에 머문  2주가 지났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낼  있었다. 새벽 1시경 1차전, 새벽 5 반경 2차전이 펼쳐지는 그들의 전투가 2주간 지속되고 있으니까. , 다행히 매일은 아니고 이틀에 한번 꼴로.


존재를 눈치채고 나니, 관심도 생긴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나이대는? 국적이나 인종은?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듣는 밤이면 내 멋대로 상상해본다. 흠, 이것은 일단 한국인의 소리는 아니야(무슨 근거로?). 그렇다면 영국인? 음, 아니 아니. 어쩐지 영어 발음이 아닌 거 같은데(신음에도 발음이 있다면). 그럼 일본 사람? 아니야.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 끼치는 거 싫어하잖아(고정관념 등장). 인도 사람인가? 인도 사람에 대해선 정보가 없어서 판단 불가. 그럼 말레이시안? 중국인?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신음소리는 거칠어진다. 나는 저들의 사랑이 짜증 나지만 때로 감탄스럽기도 하다. 누구라도 놀라지 않기 힘든 저 지구력! 저 열정! 저 광기! 부디 영원히 예쁜 사랑 하시길.


잘 시간이 다가온다. 오늘 밤엔 할까, 안 할까? 그들이 하든 안 하든 중간에 깨지 않고 쭉 자면 좋겠다. 아, 추억 돋는다. 신생아 키우던 시절 조각 잠의 추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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