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01_나에게 '로컬'이란
나는 따뜻한 남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어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촌 출신이라고 말하면, 지인들은 툇마루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마당 한편에서는 생선을 말리는 그런 곳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살던 어촌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15층 짜리 아파트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왔지만 크게 이질감은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종로나 강남까지 가지 않고서는 대도시의 매력을 느끼기 힘들었다. 서울의 여러 대학이 그렇듯, 캠퍼스 정문 앞에는 2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마을버스가 오르막길을 느린 속도로 기어올랐고, 도로는 사방으로 거미줄 같이 엮여 있는 이면도로와 골목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길목마다 오래된 식당과 주점, 자취방들이 즐비했고, 학교 앞 시장에는 떡볶이를 바가지 채 퍼주는 노점상도 있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중 1990년대 배경처럼, 나에게 캠퍼스는 서울 하늘 아래 따뜻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다. 공간에 경험과 의미가 쌓이면 장소가 된다(언젠가 공간과 장소에 대한 생각도 작업노트를 통해 정리할 생각이다). 그곳에서 학교 선후배와 동고동락하며 살았으니, 20대 나의 '로컬'은 캠퍼스 일대였다. '로컬' 하면 사실 '지방'이나 '시골'을 떠올리지만, 도시든 농촌이든 내 삶이 펼쳐지는 일상 공간이라면 모든 곳이 로컬이다. 30대의 시작과 함께 서울을 떠나 귀촌하면서 이제는 시골 마을이 나의 로컬이 되었다.
시골에서 '로컬'을 기반으로 창업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로컬에 대해 글을 쓰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로컬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유에서다. 단지 내가 발 딛고 있는 공간, 내 가족과 지인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장소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을 스스로 돌보는 맥락에서 로컬의 관심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사회에 중요한 사회문제들도 많지만, 무엇보다 나와 관계된 영역에서 출발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로컬에 대한 관심은 자기돌봄의 연장선 위에 있다.
복지차원에서 돌봄 같은 것이라기보다,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관심을 가지는 '자기돌봄'과 가깝다. 나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돌본다는 차원에서 조금 다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발굴한 '자기배려'로서 돌봄이다. 이 이야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나중에 차근차근 풀어보기로 하고, 자기돌봄은 무엇보다 타인으로 향한 시선을 자기 내부로 옮겨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나 스스로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잘 살기 위해 내 주위의 사람들, 사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 공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한다.
도시와 시골에서 자기 돌봄의 공간으로서 '로컬'의 모습은 다르다. 상대적으로 도시는 꽉 차 있고 시골은 비어 있다. 아파트, 도로, 상점 등으로 빈 공간이 없다 보니 변화의 여지를 찾기 힘들다. 내 일상을 더 살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도, 건물주가 아닌 이상 권한이 없다. 공원이 있어도 시청이나 구청에서 관리한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백이 없다(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면 시골은 빈 곳이 많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쉽게 공간의 배치를 바꿀 수 있다. 시골 빈집이 귀촌청년들의 창업공간이 되기도 하고, 짐만 가득했던 창고가 작업실로 변하기도 하며, 툇마루 공간이 피아노 연습실로 바뀌기도 한다. 나를 돌보기 위한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공간을 새롭게 창조한다. 다음 작업노트에서는 그동안 내가 시골집을 어떻게 바꿔왔는지, 그리고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쓰려고 한다. 그러면서 도시에서도 가능한 자기 돌봄의 공간으로서 로컬의 가능성도 짚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