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02_자기 주도로 장소 만들기(시골 편)
#1 시골 빈집이 창업 공간으로
10년 전쯤 이야기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골에서 창업했다. 나처럼 시골로 귀촌한 청년들을 모아서 미디어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다들 출판, 영상, 팟캐스트 등 미디어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창업 공간을 마련할 돈이 없었다.
시골 빈집을 구하기로 했다. 지인 소개로 첫 창업 공간을 마련했다. 푸른 옥수수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1층 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은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나름 마당에는 잘 가꾼 정원이 있었고 밤에는 조명도 켜졌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임대료는 1년에 200만 원이 채 안 되었던 것 같다. 창업 멤버들과 함께 도배를 하고 사무실을 꾸렸다. 거실이 넓어 창업을 도와준 사람들 20여 명을 불러 케이터링과 함께 개소식도 열었다.
옥수수밭과 버려진 축사, 창업 공간과 관련된 모든 것이 콘텐츠였다. 창업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SNS에 공유했는데, 나름 시골에서는 핫했다. 조용한 작업실이어서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 글을 썼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름이 되자 천장에서 물이 샜다. 주방 싱크대가 썩어 내려앉았다. 창업 멤버 중에 목수가 있어서 손 볼 수는 있었으나, 제대로 공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1년 정도 버티다 창업 공간을 옮겼다. 그래도 다행히 그동안 돈을 벌어 시내에 괜찮은 사무실을 낼 수 있었다.
#2 수십 년 묵은 창고가 작업실로
최근 이야기다. 내가 16년째 살고 있는 한옥집 옆에는 벽돌로 지은 뒤 슬레이트를 얹은 공간이 있다. 옛날 물건들이 가득 차 있어 자물쇠를 채운 채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해 기숙사에서 지내는 첫째 아이가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됐다. 전자기타를 전공하는데 연습실이 필요하다는 거다. 도시에는 시간당 대여료를 내고 사용할 수 있는 연습실이 있다던데, 시골에는 그런 게 없다.
잠겨 있던 자물쇠를 오랜만에 열었다. 주인집 아저씨의 가구와 책,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먼지를 털어 청소하고, 첫째 아들과 함께 도배와 장판을 직접 했다. 사람을 불러 전기 공사를 새로 하고 냉난방기를 달고 보일러 관을 연결했다. 지금은 우리 집에서 가장 아늑한 곳이다. 본채와 떨어져 있어 독립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방학이 되면 첫째는 낮에는 연주를 하고 밤에는 새벽까지 곡을 만든다.
개학해서 아이가 기숙사로 돌아가면 나만의 공간이 된다. 남자가 중년이 되면 혼자 틀어박힐 동굴 같은 곳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글도 이곳 작업실에서 쓰고 있다.
#3 대청마루가 피아노 방으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피아노 학원 대신, 웅변학원이나 주산학원(주판을 이용한 암산학원)에 나를 보내셨다. 마흔이 넘어 내 꿈을 이루고 싶어 일주일에 한 번씩 피아노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레슨을 시작한 지 석 달쯤, 체르니 100을 시작할 무렵 집에 피아노를 놓고 싶었다.
중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샀다. 요즘 대부분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나무로 만든 전통 피아노를 버리고 디지털 피아노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덕분에 헐값에 소리가 아름다운 피아노를 얻었다. 피아노를 사기 전에 먼저 놓을 곳을 고민했는데, 대청마루가 제격이었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겨울이면 옷가지나 이불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피아노를 들여놓고 나서는 나의 최애 공간이 됐다.
어설프게 연주를 해도 황토와 목재로 이뤄진 한옥집이 소리를 한번 품어서 내보내면 제법 듣기 좋은 음악이 된다. 전자기타를 전공하는 첫째 아이와 가끔씩 합주도 한다. 시골집이 한적한 곳에 있어서, 달밤에 연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4 마당의 다채로운 변화
아무래도 시골집에서 가장 넓은 여백은 마당이다. 언제나 비어있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마당에 수영장을 설치해 여름 내내 물놀이를 했다. 이곳에 이사 와서 10년 정도는 에어컨 없이 살았는데, 푹푹 찌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에는 차가운 수영장 물에 몸을 담가 열을 식혔다. 겨울이 다가오면 참나무 한 트럭을 사서 마당에 펼쳐 놓은 다음, 기계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패 땔감을 마련한다. 가끔씩 땔감 작업을 도와주는 지인들과 마당에서 불을 피워 고기와 굴을 구워 먹는다.
마당 한편에는 목수 출신(협동조합 창업 멤버였던) 친구가 만들어준 나무 그네의자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나무도 썩고 그네 줄도 끊어지고 말았다. 자리도 많이 차지해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나 싶었는데, 첫째 아이가 고쳐서 쓰자고 했다. 어릴 때부터 타고 놀던 나무 그네에 애착이 많나 보다. 고맙게도 목수 출신 친구가 다시 와서 썩은 부분을 새 나무로 덧대고, 줄을 매어 고쳐주었다.
세 살 때 이곳으로 이사와 이제 고3이 된 첫째 아이는, 자기 돈으로 산 해먹을 마당에 펼쳐놓고 누워 고양이와 노는 걸 즐긴다. 이곳에 이사 온 지 2년 만에 태어난 둘째는 어릴 때부터 마당에서 모종삽으로 흙장난하는 걸 좋아했다. 중2가 된 지금도 유튜브에서 본 걸 직접 해보겠다며, 삽으로 흙을 퍼와 마당에서 황토 벽돌을 만들기도 한다.
시골집의 공간 변화는 다채롭다. 여백이 많을수록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귀촌 일상을 정리해 봤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 오면서 라이프스타일이 많이 변했다. 늘 공간의 변신은 생활 방식의 변화와 맞물렸다. 출퇴근하지 않고 일하고 공부한 지도 벌써 6년째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몇 년 전부터 아내도 출퇴근하지 않고 나와 함께 자유롭게 일한다.
시골살이에는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는 로망이 있다. 하지만 삶은 현실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로망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지속가능한지에 대해 늘 고민하고, 때로는 불안해한다. 다음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시골집의 현실도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