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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명진 Jul 16. 2017

청년귀촌에 대한 꼰대들의 편견

시골창업일기 2

청년이 시골에 살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신문, 방송에 노출될 기회도 많아진다. 시골과 청년은 생소한 조합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소재이다. 젊어서 시골에 오면  "인간극장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 이런 말은 자랑이 못 된다. 나도 한두 번은 그런 요청에 응한 적 있지만, 가족들까지 방송에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한 적이 더 많다. 


귀촌한 동료들과 함께 시골에서 창업한 회사도 언론에 종종 소개되는 일이 있었다. 귀촌한 청년들이 모여 시골에서 미디어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했나 보다. 블로그에 이런 활동을 소개한 글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적이 있다. 순식간에 조회수가 1만이 넘더니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우호적이지 않았다.


"저건 몇 개월 할지"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저것도 먹고살만하니 내려간 거 아닐까요?"

"호기로 농사짓겠다고 내려가 겨우 몇 개월 해보고 안 되겠다고 포기를 합니까? 그러고 나서 무엇을 전달하겠다는 건지..."


다른 창업 멤버가 일간지에 연재하는 귀촌일기의 댓글은 더 가관이다.


"빨리 도시로 나와라. 이게 힘들다면 무슨 귀촌이냐"

"삶이 놀이터냐. 땀 안 흘리고 편하게 사는 것이 자랑이냐."

"행복만이 최선인가. 행복만 가득하면 인생은 나태해진다. 나만의 행복을 버리고 도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물론 비난부터 하고 보는 댓글문화, 귀농귀촌 성공 사례를 부풀려 떠들어대는 언론에 대한 반발감이 섞여서 나온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산다고 하면 대다수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요즘에는 청년 귀촌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청년 시골행'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곱지 않다. 시골에 내려가면 왠지 삶이 안일해 보이고, 시골을 떠나 도시에 입성하지 못한 청년을 '못난이'로 보는 꼰대들의 편견이 있다.




서른 살에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귀촌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께 미리 알리지 않았다. 반대하고 걱정하실게 뻔했기 때문이다. 시골집에 직장까지 구한 다음 연락을 드렸다.

서울로 다시 올라갈 때까지 앞으로 아버지한테 연락할 생각 마라.

아버지는 부자의 연을 끊자고 하셨다.(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표 꼰대'시다.) 없는 살림에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보내 놨던 장남이 '촌구석'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께서 느꼈을 참담함을 이해한다.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했으니 실망감이 크셨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살아갈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부자의 연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촌한 지 6개월 만에 부모님이 귀촌한 시골집을 들르셨다. 잠깐 우리 집을 자랑하자면 해방 직후인 1946년, 대목수가 지은 한옥집으로 넓은 다락방이 있고, 여름이면 큰 풀장을 펼쳐 놓을 수 있는 마당, 그 앞에는 150평 정도 되는 정원 같은(풀로 덮여 있을 때가 많지만) 텃밭이 있다. 서울 봉천동에 살던 집은 10평 남짓이었지만, 지금 사는 곳은 대지가 598평이다.(시골집은 불편하다. 시골집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길 바란다.) 아버지는 어린 손자들이 마당에서, 밭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셨다.


"애들 클 때까지는 시골에 있어도 되겠다."


아들의 '시골행'에 대해 아버지는 묵인하셨다. 가끔 전화하셔서 "언제까지 시골에 내려가 있을 거냐? 도시로 언제 올라갈 거냐?"(여전히 부모세대에게 시골은 '내려오는 곳'이고 도시는 '올라가는 곳'이다.)고 물으셨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다. 평소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주셨던 어머니도 "네가 장남인데 시골에서 안주하며 살까봐 걱정"이라고 하셨다.

 



명절이나 결혼식날 친척들을 만나면 나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사실 내 몸 한 구석에도 꼰대들의 걱정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골 삶이 스스로 만족스러웠지만 떳떳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친척들은 대기업에 다니는지, 연봉은 얼마를 받는지, 어떤 차를 끌고 왔는지가 중요했다. 삶의 기준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도 은근히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친척들을 만날 때면 중고로 산 2002년식 승용차를 깨끗이 청소하고 광을 냈다.


내가 시골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친척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지 않으신다. 물론 나도 여전히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다.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시골행을 권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스스로 자랑스러우면 됐지, 왜 다른 사람 기준에 맞추려고 해? 부모님께 인정만 받으면 여보는 행복해져?

그런 아내의 응원 덕분에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을 일을 찾아 헤맸다. 스스로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부모님도 언젠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시골에서 창업까지 하면서 부모님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돌아섰다. 시간이 더 흐르면 반을 차지하고 있는 걱정이 대견함으로 바뀔 거라고 확신한다.




꼰대들은 청년들의 '시골행'을 패배주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도시에서 버티지 못해 시골로 내려간 '못난이'. 하지만 시골이라는 또다른 라이프스타일을 택하는 것은 인생에서 큰 도전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은 웬만한 용기 아니면 실천하기 쉽지 않다.


시골에서 만난 귀촌청년들 대부분 나름의 꿈이 있었다. 농사가 좋은 친구는 농부로, 나무를 만지는 것이 좋은 친구는 목수로, 정원을 가꾸는 일이 좋은 친구는 원예가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작가로 살아간다. 시골 삶은 매 순간 도전의 연속이다. 도시에 비해 갖춰진 것이 적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살아가려면 스스로 모든 일을 꾸려야 한다. 거기에 시골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살아가려면 얼마나 고민하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남들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는 도시의 수동적인 삶이 싫어서 시골로 온 친구들이다. 취업을 위해 요구하는 각종 스펙들, 끝없이 오르는 월세와 전세,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을 강요하는 도시의 기준을 과감히 던져 버린 것이다. 지금 행복한 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잘 사는 건지 고민하고 실험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시골에 많다.


이런 친구들에게 '자신만의 행복을 버리고 도전의식을 가지라'느니, '삶을 (만만한) 놀이터로 보느냐'느니, '또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두겠지' 등등의 말을 던지는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보다 더한 '대한민국 일등 꼰대'들이다.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이 시골이지만 창업을 했다고 하니 대견해하신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일등 꼰대들에게 한마디.


너나 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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