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신체에 깃든 건강한 정신. 진부한 말은 언제나 옳다.
'당신은 스스로 다루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에 있거나 뜻하지 않은 정서적 불편감을 경험하면서 대처 곤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환자용 보고서 결과지 / 검사 타탕도 : 타당함 / 일자 : 2025.09.09 / 환자성함 : OOO
심각한 공황장애와 만성우울증. 그로 인한 수면장애. 뭘 먹어도 무미무취로 떨어진 입 맛. 흐리멍덩한 눈. 하루 종일 띵한 머리. 세 달 전의 나는 정말 엉망이었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직 의사를 밝힌 지 2주 만에 본부장 최종 승인까지 받아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가능했다. 너무 감사했다. 가정일로 힘들 때면 더 악착같이 일에 몰입했던 나였다. 덕분에 본부 내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누락 없이 부장까지 단 최초의 여직원이 될 수 있었다. 승진 발표가 작년 12월 초였으니 어떻게 보면 먹튀를 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애가 한눈에 딱 봐도 메롱한 상태이니 쉬라 하는 수밖에. 어쨌든 그렇게 나에게 6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정신과 진료 상담 예약이었다. 나는 약 먹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무슨 오기인지 똥고집인지 코로나도 독감도 약만 타 두고 쌩으로 앓아 버텼다. 그렇게 무모하고도 미련한 사람이 바로 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으로 육신을 다스린다는 것이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 싫었다. 하지만 이번엔 먹어야 했다. 일주일 간 수면시간이 10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1시간 단위로 깨기 일쑤였으니 정상적인 하루 일과를 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나를 없애는 것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심히 정상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담당 의사도 우울증 정도가 너무 높은데 어떻게 지내셨냐 물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엔 제때 약을 챙겨 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의지로 멀쩡해지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운동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내 평생 수의운동에 해당하는 운동이라곤 저작운동(음식물 씹기) 정도가 다인지라 뭐가 적당할까 고민했다. 소싯적 한 뜀박질하던 나다. 그래서 돈 안 들고 가장 만만한 달리기를 시작했다. 정신건강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저녁시간 남편과 한 공간에 있는 게 견디기 힘들어 나가야지 한 것도 한 몫한다. 이유가 뭐였든 간 그렇게 뛰기 시작한 것이 벌써 40일이나 됐다. 요즘 러닝이 붐이라더니 아파트 단지 내 러닝트랙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엄마 손에 끌려 나온 듯 투덜대며 뛰는 둥 마는 둥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중학생. 그냥 딱 봐도 깨 볶는 소리가 옆동네까지 들릴 듯 행복해 보이는 신혼부부. 손을 꼭 잡고 느릿하게 걷는 사이좋은 노부부. 정말 살려고 뛰는 것 같은 생존 의지가 불타는 4050 내 또래들까지. 트랙 위에는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으로 다양한 이웃들이 걷고, 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혼자 달린다. 나 빼고 다 행복해 보였다. 당연히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모두가 반드시 옆에 누군가와 동행하며 박동하고 있지만 내 심장만 홀로인 느낌이었다. 이혼 준비하며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 다짐했것만 결국 이러고 있다. 난 좀 다르겠지 했지만 나 역시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혼자가 된다는 건 외롭고 잔혹하며, 끝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라 자꾸 속을 긁었다. 며칠은 달리면서도 현타가 왔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차라리 더 빨리 뛰어서 내 모든 피가 심장으로만 흐르게 해야지. 그래서 아무 생각도 못하게 해야지.' 이러면서 매일 5km를 뛰었다. 처음엔 다 뛰는데 40분 정도가 걸렸다. 처음부터 무작정 빨리 달리니 오히려 뒤로 갈수록 숨이 차 더 느려졌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처음 몇 바퀴는 천천히 뛰다 후반부에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천천히 달궈진 심장은 느리지 않은 속도로 뛰고 있음에도 숨이 차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호흡과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맞추며 점점 내 안에서 리듬이 생겼다.
처음엔 답답하고 무겁던 가슴이 이제는 하나하나 생기가 실리는 느낌. 속도를 서서히 조절하며 달리다 보니 나는 내 몸의 한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발바닥이 트랙을 박차고 몸을 띄우면 심장이 요동치고 폐가 공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잡념이 하나, 둘 흩어졌다. 온전히 나 자신과 나의 몸에 집중하는 시간. 몸도 머리도 가벼워지는 것이 신기했다. 무리하게 빨리 달린다고 성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지금 나는 일생일대의 대 변화를 앞두고 있다. 달리기를 하며 지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내 리듬과 호흡, 신체의 움직임을 존중할 때 비로소 지치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해치지 않고 건전하게 일어서는 방법을 알게 됐다.
요즘엔 달리기는 그냥 단순한 운동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감각을 되찾는 시간이고, 내 안의 무거운 감정과 불안을 흘려보내는 의식 같다. 달리면서 나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내려놓았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선명한 눈과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심장이 뛰는 리듬과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조화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중심에 서 있다. 끝없이 이어진 트랙 위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함께 뛰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달린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조차 단단해지는 나를 느낀다.
'건강한 신체에 깃든 건강한 정신.'
진부한 말은 언제나 옳다. 이제는 아파트 러닝트랙에서 나만큼 잘 달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구역 달리기 일짱이 되었다. 빠르면 28분. 비가 와도 달린다. 자칫 미친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뛰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지 아는가. 복잡한 일이 온 감각을 마비시고 불안에 압도되는 고통을 겪고 계시다면 머리숱 걱정일랑 말고 한번 뛰어보시라. 정말 너무 좋다. 나를 한번 믿어보시라. 강추다.
여전히 잠은 잘 오지 않지만 우울감과 공황발작은 현저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이제 스스로 다루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에 있거나 뜻하지 않은 정서적 불편감을 맞닥뜨린다 하더라도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충분히 대처 가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미지 출처 : 삼성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