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혹시 군대에 들어온 걸까?
※ 「어쩌다 부장언니의 직장생존기」 본격 시작에 앞서 미리 두 가지 사항 공지드립니다.
① 앞으로 본인 신상보호 차원에서 어쩌다 부장언니의 이름은 '최르미온느'라 쓰도록 하겠습니다.
② 한글을 사랑하시고 귀 여기시는 분들의 눈에 불편할 이 바닥 업계(?) 전문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점, 감안하시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알아들었으면 "악!"으로 대답합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악!!"
: '내가 혹시 군대에 들어온 걸까.' 하고 의심이 든다면 얼추 맞다.
[ PM 5:00 ]
- 최르미온느님, 회장님 지시사항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초안 보여주세요. 배경은 이렇습니다. (중략. 대충 골 아프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아침에 다시 전달하겠습니다.
- 네. 내일 조금 서둘러 출근하겠습니다. (들리는가. 아침잠 날라가는 소리가.)
긴급 수명업무가 자주 있진 않지만 없지 않은 곳. 바로 직장이다. 사실 이런 특수임무가 항시 도사리고 있다 생각해 두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터니이 그냥 받아드리자. 아니, 그냥 이곳은 총성 없는 전쟁터라 생각해 두는 편이 좋겠다. 나는 지금 퇴근 1시간을 목전에 두고 VIP 보고자료를 만들라는 업무를 하달받았다. 요즘 MZ*들이 극혐한다는 퇴근임박 업무지시다. 참고로 나도 MZ다. 극혐이다 증말. 하지만 유능한 직원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되게 하는 사람이다. 안 되는 것 따윈 있을 수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
*MZ세대는 M세대(밀레니얼세대, 1981~1996년생)와 Z세대(1997~2012년생)를 묶어 부르는 표현으로 만 43~44세부터 만 12~13세까지 해당
이런 긴박하고도 숨 막히는 업무 지시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황하지 말고 어쩌다 부장언니, 최르미온느만 믿고 따라오시라.
1) '업무지시 배경, 목적, 보고대상, 보고기한' 무슨 일이 있어도 필히 우선 확인하고 착수하자.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넉넉치 않다. 늘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까. 위 사례의 경우 친절하게도 업무배경을 미리 알려주며 지시가 이루어졌지만 거의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업무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더 허다하리라 본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왜?"라는 물음이다. 직장 생활하다 보면 무조건으로 일단 "네!"부터 때리고 보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대단하다. 독심술이 가능하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다. 업무의 '배경, 목적, 보고대상, 보고기한'을 모른 채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배에 지도, 나침반, 식량, 선원도 없이 홀로 항해를 떠나는 것과 같다. 무모하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방향을 잃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왜?"는 몹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업무배경은 가장 먼저 궁금해 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이 일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때문에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될 소지가 매우 높아진다. 그다음은 업무목적이다. 목적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최종 결과물, 즉 보고받고자 하는 사람의 의중을 벗어난 결과가 도출되기 십상! 이 경우 무조건 다시 보고하게 될 거다. 또한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보고인가는 자료 상 디테일의 경중을 가르는 중요 요소다. 따라서 반드시 선 확인 후 자료 작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이 헛돌며 지나친 간소화 또는 생략으로 실무 활용이 어렵게 되거나, 반대로 너무 세밀하게 작성되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 혹은 "핵심만 다시 요약 보고해 주세요." 등 빠꾸(?) 맞을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보고기한이다. 아무리 완벽한 보고서라도 '지금, 당장, 빨리.'를 요구하는 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조금 완벽성이 떨어지더라도 시급성을 요하는 사항이라면 필요한 내용만 방향에 맞게 잘 들어가 있다면 좋은 보고라 할 수 있겠다. 급해 죽겠는데 자료에 디자인 입히고, 표지 그리고 앉아 있게 된다면 기다리는 옆 사람 눈에 빡침이 깃들게 되는 것은 한순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업무 배경, 목적, 보고대상, 보고기한. 이 4가지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업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의 질을 수직 상승시키는 절대 원칙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만이 방향을 설계할 수 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일을 잘하고 싶다면 언제나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 움직이자. 그것이 진짜 일머리의 시작이다.
2) 무의식 중에도 눌러야 할 단 두 개의 버튼. Ctrl+S
개발자들 사이에선 "어?" 하면 보통 예상치 못한 문제나 버그가 발생했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한다. 사무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 작성해 둔 파일이 뻑* 나거나 이유 모를 갑작스런 시스템 오류 또는 화면 멈춤 현상이 발생하면 온몸의 구멍으로 기운이 빠져나간다. 온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극심한 외로움에 휩싸이게 된단 말이다. 몇 번의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오욕의 세월을 버티다 보면 깨닫게 된다. 사무실에서 신뢰할 수 있는 단하나는 결코 나 자신도, 옆 동료도, 팀장도 아닌 오직 Ctrl+S (저장 단축키) 뿐인 것을. 파일 저장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위험 관리의 기본기다. 갑작스러운 정전이나 시스템 다운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자동 저장이 켜져 있어도 마지막 저장 이후 5분 동안의 작업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협업 문서나 프로젝트의 경우 저장 시점이 곧 이후에 설명하게 될 버전의 기준이 된다. 즉, 저장하지 않으면 팀 전체의 기준도, 일정도 함께 저 먼 우주 속 한 점 먼지로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Ctrl+S 를 일종의 리듬처럼 써먹는다. 문장 하나 완성하면 Ctrl+S. 그래프 하나 그려 놓고 Ctrl+S. 잠시 멍 때리다 Ctrl+S. 심호흡하듯 Ctrl+S를 누른다. 이 습관 하나로 그 몇 시간, 아니 그날 하루가 안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수는 줄고, 불안은 사라진다. 혹시 저장하면 안 될 것이 저장되었다 하더라도 걱정 마시라. 모든 파일(ppt, word, hwpx, excel 등)에는 이전으로 돌아가기 기능이 기본적으로 다 들어가 있다. 그러니 안심하고 누르시라. 단, 파일 자체를 껐다? 그럼 저장 시점 돌리기 기능(나중에 이 기능도 다뤄 보겠다.)을 이용해야 한다. 어쨋든 살릴 방법은 찾아진다. 찾아야 할 것이고. 결국 수시 저장은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자 고생한 자신과 팀원들에 대한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하면 너무 오버일까? 혹시 저장이 귀찮으면 수시로 작성 파일을 동료들에게 뿌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으나, 이는 바쁜 동료를 임시 저장소로 쓰는 행동이므로 가능하면 스스로 관리하는 게 가장 좋겠다.
*뻑 나다 : 파일에 문제가 생겨 제대로 열리지 않거나 손상되었을 때 사용하는 직장인 전문 속어. 보통 컴퓨터가 먹통이 되거나 갑자기 전원이 나감, 또는 ppt 화면이 회색으로 변하는 일명 '멍듦' 현상, hwpx의 경우 자동 꺼짐 등 이상 현상을 통칭
3) 버전관리만이 살 길이다.
촌각을 다투는 수명업무일수록 보고자료 상 들어갈 내용이 수시로 바뀔 확률이 매우 높다. 사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토해 둔 것이 있다고 하면 모를까. 최종 피보고자가 다름 아닌 최고경영자, 대표이사 등인 경우라면 해당 자료를 보고하게 될 사람은 자료에 신중의 신중을 기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수시로 생각이 바뀔 확률이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자료를 다루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버전 관리 체계를 명확히 세워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일명에 날짜나 버전 번호를 일관되게 기입하거나 어느 시점의 자료가 최종본이었는지 별도 기호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상급자의 지시나 수정사항이 시시각각 달라질 가능성이 높은 업무일수록 이전 버전과의 차이를 빠르게 비교할 수 있는 구조가 필수적이다. 또한 보고 라인 내의 커뮤니케이션 속도와 정확성 역시 버전 관리만큼 중요하다. 같은 문서의 다른 버전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수정하는 경우, 최종 취합 단계에서 오류나 누락이 생기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담당자 간 수정 권한과 책임 구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수정 시점마다 간단한 변경 사항을 간략하게 라도 공유하는 것이 좋다. 결국 수명업무일수록 보고자료는 속도와 정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그 두 가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본이 바로 체계적인 버전 관리와 투명한 소통 시스템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어쩌다 부장언니가 자주 사용하는 버전관리 파일명 예시다. 참고하시어 신속, 정확하게 수명업무를 처리해 일잘러로 거듭남과 동시에 상급자에게 확실하게 눈도장 찍는 계기를 마련해 보길 바란다.
(버전관리 예시)
어쩌다 부장언니의 업무노하우_v0 : 초안
어쩌다 부장언니의 업무노하우_v1 : 초안 보고 후 1차 수정 시
어쩌다 부장언니의 업무노하우_v1.1 : 1차 수정 중 중간검토자 등의 보충의견으로 수정을 거쳤을 때
어쩌다 부장언니의 업무노하우_v1.1★ : 최종 컨펌 자료
어쩌다 부장언니의 업무노하우_250101 : v1.1★ 파일 복사본으로 최종 작성일 또는 보고일을 파일명 맨 뒤에 붙인 최종 공유 또는 보고자료
※이미지출처 : 루리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