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시계를 다시 맞추다.

나만의 완전한 너를 향한 발걸음

by 뮤뮤

살면서 딱 한번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맛본 적이 있다. 겨울 출근길이었다. 전날 감기가 심해 잘 먹지도 않던 종합감기약을 아침에 때려 먹었다. 골골 거리는 몸을 이끌고 지하철역으로 난 경사진 내리막 길을 걸을 때였다. 두 발이 공중에 뜨는 느낌. 팔을 뻗어 땅을 짚고 싶었지만 두 팔 역시 펴지지 않고 오그라 들었다. 내 맘 같지 않았다. 온몸이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굴부터 떨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목을 비틀어 다행히 상처는 면했지만 머리엔 크게 혹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러지. 무서웠다.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께서 부축해 일으켜 주셨고, 그 옆 이름모를 중년 남성분이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내 소지품들을 주어다 수습해 주셨다. 감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두 발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눈물이 줄줄 나왔다. 잔뜩 겁에 질려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은 지방에서 근무한다. 즉 도움을 요청해도 한달음에 와줄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내가 누구에게 전화하여 알릴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역력했다. 본인이 지금 어떻게 가느냐, 근처 병원에라도 가보라 했다. 당연히 그러할 예정이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당장 달려와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걱정 어린 목소리, 그런 안타까움이 담긴 마음, 위안이었다. 그는 왜 내가 필요로 하는 순간 항상 내 옆에 없는 걸까. 있어주지 않는 걸까. 그의 세계에 왜 나는 늘 미루고 미룬 숙제 같은 느낌일까. 나를 사랑하긴 한 걸까.

첫 아이 임신 후 딱 한번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에 같이 갔었다. 별거 아닌 간단한 진료와 함께 임신임을 확인받는 자리였다. 여느 여자들이 그렇듯 남편과 함께 새 생명의 기쁨, 행복, 고마움 등의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여전히 생생하다. 그 심드렁한 표정이라니. 그 이후 진료부터는 철저히 혼자만 다녔다. 또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표정은 저래도 속은 기쁠 걸 거야. 아무렴 기쁘겠지.' 하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슬프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고 억지로라도 그를 이해해 보려는 방법을 매번 택해 왔다. 그 방법 외에는 나의 세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뭘 더 어쩌겠는가.


광활한 우주 속 작디작은 행성, 그 안에서도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 또 그 속의 먼지 같은 존재들끼리 나눈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사랑키로 한 언약 따위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취급되어 버리는 것이다. 너무나 작은 존재들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뭘 더 어쩔 수 있느냔 말이다. 나는 참 미련하다. 남편 말처럼 대책 없이 멍청하다. 내 세계에 이혼은 없었다. 이 가정만이 나의 세계이니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철저히 다른 답지는 없었다. 갇힌 세계 속 갇힌 결말. 그렇게 나의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고장 난 시계처럼 말이다.


아무리 매일 스스로 강해지자 다짐했지만 나는 나만의 완전한 존재를 원한다. 나는 매우 의존적이고 취약한 사람이다. 인정한다. 그러니 나는 나만의 존재가 필요하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 고통은 오직 '나만의 너'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러한 존재가 남편이 아님을 깨달은 것뿐이다. 이제야. 나의 갇힌 세계는 오늘도 확장을 모른다. 겨우 한걸음 내디딘 나는 이 이혼이 나에게 다른 세계도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열린 결말로 더는 아파하지 않는 나를 써 내려가길 기대한다.


이혼은 내게 상실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신호라 믿는다. 그동안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열리며 빛이 스미고, 숨이 돌아옴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비슷한 하루 속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말이다. 누군가를 붙잡지 않아도 괜찮고, 누군가의 그림자 안에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의 열린 결말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된 서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다리가 허공에 뜬 공포감을 나는 너무 잘 안다.

멈춰 있던 시계에 약을 갈고, 시간을 다시 맞춘다.

그리고 다시 이 땅 위에 두 다리 단단히 내려 걷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나만의 완전한 존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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