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하늘의 뜻대로.
가장 용감한 행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
우리 집은 장수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아흔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길쭉한 원통형 러시아 전통 털모자인 파파카(쿠반카라고 불린다고도 한다.)를 쓰시고 모스크바 미술전시회를 다녀오실 만큼 정정하셨다. 화투점과 장구소리에 맞춰 노래하시는 것을 즐기시던 쾌활한 나의 외할머니는 임종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도 그 많은 손자, 손녀 이름을 다 기억하시며 106세까지 맑은 정신을 유지하셨다. 그리고 동네 제일가는 잉꼬부부로 유명한 친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크게 아프신 곳 없이 건강한 상수를 앞두고 계신다. 이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행운아다. 그 흔한 아토피, 비염, 알레르기 하나가 없으니 말이다. 감사한 일이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아프지 않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건강은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게 하는 근원이자 마음을 지탱해 주는 토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 건강은 어떨까? 나는 우울증으로 참 오랫동안 힘들었다. 불면증은 물론, 공황장애도 있었다. 최근에는 증세가 심해져 중요 세미나 발표를 앞두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발표를 맡겨야 했다. 그래서 휴직계를 냈다. 회사에서는 수많은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아 늘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집에서는 아이들 양육 방식과 교육 문제를 두고 시어머니와 남편의 결정 속에 내 의견은 번번이 묵살되었다. 어디에도 내 목소리 낼 곳 하나 없다는 사실이 숨 막혔던 것 같다.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노래로 감정을 말하고, 그림으로 심정을 그리며, 글로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 좋다. 사람들 안에 나를 녹여내며 수용되는 느낌이 좋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느낌. 그럴 때 나는 진짜 이 생을 온전히 살아 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동안 어느 하나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다. 몸이 버텨주니 괜찮은 것이라 못 본 체하였고, 마음이 조금 아픈 것은 내가 나를 잘 달래면 될 일이라 치부하며 내 마음의 소리를 죽여왔던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 나를 다 내어주고 정작 스스로를 챙기지 못하는 삶은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이렇게나 병들게 하는 것이다.
호되게 아파보니 알겠다. 육체가 나를 세상에 붙들어주는 중력 같은 것이라면, 정신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돌보기로 했다. 더는 미련 두지 않기로 했다. 흘러가는 대로, 하늘의 뜻에 내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먹는 것은 가볍게. 숨을 깊게. 발걸음은 천천히.
이 모든 흐름은 운명이고, 회복이며, 나를 살리는 길임을, 숨결임을 믿는다.
삶은 기적이다.
그 기적 안에서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오늘도!
찬란하여라! 나의 인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