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흑역사는 있다.

프롤로그 : 흑역사가 혹시 흑흑 울어서 흑역사일까?

by 뮤뮤

나는 말 많고 탈 많기로 악명 높은 OO그룹 법률지원부서로 입사해 지금까지 팀 이동 한 번 없이 말뚝박고 있는 워킹맘, 경력 16년차 부장언니다. 고인물이다. 동료들은 나를 다양한 호칭으로 지들 편할 대로 부른다. 최르미온느(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여주인공 헤르미온느에서 따옴), 횬다르크(프랑스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여군 잔다르크의 변형), 형(아니 왜?), 햄(경상도에서는 형을 햄이라 부른다지), 언니(이건 이해함), 웅냐(참나), 찡찡(휴...). 이 외에도 이상한 게 많다. 임직원 간 'OO님'으로 부르라는 사내 공지가 무색하다.


그래도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아무래도 최르미온느다. 본 별명의 원 주인인 헤르미온느는 3학년 때 타임터너(해리포터 속 마법 정부에 속하는 미스터리부에서 만든 시간을 되돌리는 물건)를 이용해 호그와트의 모든 과목을 수강했다. 나 또한 그녀와 같은 머글이지만 호그와트 졸업장이 없어 그런 물건을 습득하진 못했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 같은 시간 내 많은 일을 처리해 낸다는 맥락에서 참 잘 갖다 붙인 것 같다. 나의 선후배, 동료들은 재밌는 사람들이 많다. 이 별명도 한참 후임이 만들어 줬다. OO대리 칭찬해! 하지만 그거 생각할 시간에 오탈자만 좀 더 신경 써주면 좋겠어^^ (느껴지는가. 이 다정한 살기가. 아브라카타브라!)


듀얼모니터 속 내 세계는 좋게 말하면 멀티태스킹의 성지고, 나쁘게 말하면 토 나온다. 화면을 반으로 갈라(윈도우키+방향키 : 화면을 쪼개 사용할 수 있는 단축키로 창 위치 및 크기 조절이 가능함. 외워두시라.) 메인 모니터 좌측에는 참고 중인 자료를, 우측엔 작성 중인 보고서(ppt, word, hwpx)를 띄운다. 그리고 보조 모니터 좌측에는 법제처 법령3단 비교창을, 다시 우측엔 사내메일을 띄운다. 보통 그렇다. 동시에 사내메신저 팝업창은 화면 우측 하단에서 연신 껌뻑인다. 그뿐인가. 인터넷 창은 기본 3-40개 사이트에 접속되어 있고, 책상엔 검토해야 할 서류뭉치가 실시간 올려진다. 말 그대로 넋이라도 있고 없고인 상태인 것이다(죽여줘).


여느 조직의 우두머리 아니, 임원들이 그렇듯 우리 본부장님 또한 누가 누가 농땡이 아니, 곳간을 축내는지 아니, 우매한 직원들을 직접 일깨워 주시고자 몸소 순시, 아니 감찰, 아니 민생 순방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시는데, 매번 내 자리 옆을 지나실 때마다 한 마디씩 하신다(늘 똑같은).


- 그렇게 많이 띄워 놓으면 뭐가 어딨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 네. 이게 제 밥 줄 인걸요^^ (미소 장착 必. 메모하라.)


지금이야 고이다 못해 썩을 듯 이 일만 해왔으니 임원들이 어! 하면 아! 하고 알아듣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나도 입사 초기에는 한 어리바리했었더랬다. 한 번은 보고서 하나 가지고 몇 달을 빠꾸(?) 먹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은 다 어디로 갔는가.' 등 병진력 쩌는 질문으로 온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때 내 맨탈 지킴이 동기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밥 한 끼나 사 먹고 다닐 수 있었을까. 회사생활에서 가장 의지되는 그룹을 꼽으라면 단연 동기다. 동기사랑은 나라사랑 이상인 것이다. 밥 줄 유지 동력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며 업무 이해도는 최저였던 그때가 그래도 제일 재밌었던 것 같다. 맨날 혼나는 것은 끔찍했지만 말이다. 옆팀 동기가 팀장한테 박 터지게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동기 사내메신저 창은 온갖 걱정과 조롱이 한대 뒤섞인 젖과 꿀이 흐르는 상태가 된다. 그날은 어김없이 끝나고 모여야 한다. 동기소집이 있는 날이다. 부어라 마셔라. 회식인 것이다. 크, 청춘이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가 많이 없다. 서로 아끼고 위하는 끈끈한 정, 전우애 같은 것 말이다.


어쨌든 나도 입사 초 정신 못 차리고 신나게 까이곤 했는데, 이전 계약직연구원으로 근무했던 곳에서 얻은 갑상선항진증이 문제였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당시 거주지와 회사 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직행버스로 왕복 4시간 반. 더구나 당시 직행버스는 정원관리가 철저하지 않아 좌석이 다 차면 통로에도 사람을 태웠다. 출근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그때 처음 보았다. 밀고, 밀고, 끊임없이 밀고 들어간다. 나도 열심히 밀었다. 안 그러면 지각이니까. 그렇게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직원이 허구한 날 아프다고 지각이고, 회사에선 급기야 존다. 참고로 갑상선항진증약은 먹으면 엄청 졸리다. 그러니 이뻐 보일리 없다. 제 일이랄 것도 해봐야 고작 선임들 보고자료에 사용될 백데이터 쌓는 일 정도인데 그마저도 시원찮으니 아주 눈엣가시다. 당시 팀장은 부문장과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다. 팀장이 보고하면 여지없이 부문장의 태클이 시작된다. 그러니 팀장은 팀원들에게 흠결 하나 없는 더없이 완벽한 자료를 요구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약에 취한 자, 몸이 약한 자, 아직 뭣도 모르는 쌩초짜 신입이 아닌가. 내 백데이터가 흔들렸고, 그것을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한 선임의 자료도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팀장. "이거 맞지? 확실하지?" 만 연신 외치다 그 자료를 가지고 그대로 본부장 방에 들어갔다. 그 이후 일은 생략한다. 그렇게 된 거다.


본부장 방에서 나온 팀장은 얼굴이 새 빨겠다. 그리곤 곧장 자료 수치가 왜 이 따위인지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말해 뭐 하나. 백방 내 실수인 것이다. 나로 인해 시작된 내리갈굼은 본부장에서 팀장으로, 팀장에서 내 선임의 선임으로, 선임의 선임은 나의 선임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가 절로 나올 법한 장관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팀장의 개인 면담.


- 몸이 그렇게 약하면 그만둬야죠?


입사 후 2주도 안된 한 없이 귀엽고 병약한 신입에게 팀장이 한 말이다. 다들 알 거다. 사회초년생에게 팀장이란 하늘보다 더 높은 존재라는 것을. 그런 하늘이 내게 그만 두라 한다. 너무 무서웠다.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장님~ 나빠요."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내 처신도 잘못 됐다.


- 팀장님, 사실은 제가 몸이 그래서 약을 먹고 있고, 졸음이 오고, 출퇴근이 너무 힘들고, 일이 너무 어렵고...(이하, 생략. 대충 찌질했음.)


구구절절 신세한탄 아닌 한탄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최악이다. 그저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그런 일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한마디면 됐을 것을. 그땐 몰랐다. 사회에서 이해를 바라며 늘어놓는 변명은 죄악이다. 사정없고, 힘들지 않은 자가 어디 있나. 그러나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서 나온 말이다.


이렇듯 지금은 난다 긴다 일 좀 제법하고 이 바닥에서 나름 악수깨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나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신입 시절이 있었다. 뭘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사회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가 정말 중요하다. 소위 말하는 외교관의 언어. 우아하게 거절하고, 예의 갖춰 내 의사를 피력할 줄 알아야 하는 곳이 바로 사회다. 나는 그런 곳에서 나만의 영역을 만들고 대체 불가한 사람이 되려 무던히 노력해 왔다. 물론 지금도 계속 노력 중이다.


나는 '어쩌다 부장언니의 직장생존기'를 통해 나의 노하우를 죄다 쏟아볼 생각이다. 보고서 한 줄, 상사 한 마디에 숨은 의미, 보고 타이밍까지. 사회에서 굴러본 사람만 아는 '살아남는 진짜 기술'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닌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한마디가 내겐 수 백번의 야근과 멘붕 끝에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나처럼 똑같이 헤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이 될 것이다.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치열한 전쟁터다.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다치고, 덜 상처받고, 덜 후회하길 바란다.


이 글이 오답정리 노트쯤 되면 좋겠다.


- 어쩌다 부장언니의 프롤로그 끝




*이미지출처 : 모비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