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말
- 접근금지가처분도 필요한 부분인지 검토 중입니다. 혹시 남편분이 물리적 폭력도 행사하시나요?
- 아, 말싸움 중 서로 격양 돼 밀치고 했던 적은 있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 뿐이지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이 더 큰 폭력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사신 거잖아요. 일단은 남편분에게 최소한의 도덕적 인내가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해당 내용은 넣지 않겠습니다.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접근금지가처분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범죄자 취급받는 느낌일 텐데. 그럼 그도 너무 힘들 텐데...'
변호사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무너져 내린다. 난 아직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걸까. 내가 내지른 이혼이라는 피를 토하는 잔인한 과정 속 그가 받을 고통을 걱정한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본격적으로 이혼 준비를 하면서부터 온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주말이면 아이들 끼니때 외에는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밖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한창 열 올리고 있는 남편의 한숨과 고함소리가 들린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기엔 아직은 어린 작은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날 닮은 큰 아이는 조용하다. 그저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으리라. 매 시간 심장과 폐가 오그라드는 느낌. 손과 발, 안면부가 저릿저릿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 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제 아빠에게 붙들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 앞에 앉아 학습지에 학원숙제들로 옴짝달싹 못한다. 너무 안쓰럽지만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를 못하게 하면 되려 아이들이 난리다. 아빠한테 혼나니 엄만 가만있으라며. 그러니 나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챙겨 주는 일 외에는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방안에 들어앉아, 얕은 숨만 연신 몰아쉬며, 그렇게 나의 작은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다.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견뎌내는 것이다. 이런 것도 과연 엄마라 할 수 있을까. 자기혐오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아이들 교육에 무책임한 인간. 저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 제 말만 하는 벽창호. 생각이 짧고 아둔한 천치. 남편이 바라보는 나란 사람이다. 나는 정녕 이리 못난 사람인 걸까. 중심을 잃는다. 사라진다. 이젠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는 모르겠다. 몇 번의 자살시도. 늘 내가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치부해 왔다. 그러니 이 모든 고통은 나로 인한 것이다. 그가 받을 상심을 생각하니 내가 또 죄인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또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내 몰아야만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다 내 탓이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들어와도 당신 편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만큼 부부란 서로에게 어떤 치명적 결함이 있더라도 언제나 함께 해줄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당신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되겠느냐.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언제나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확실한 사람이다. 그처럼 나도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해 놓고 뻔뻔하게 이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언제나 당신 편이 되어 줄 수 있다고 했으면서. 나는 위선자다.
나는 지금의 자학의 시간이 얼른 끝나길 기다리며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창 너머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온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든다. 숨이 턱 막혔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공기마저 메마른 정적 속에 오래전 즐겨 듣던 음악을 재생한다. 노래는 여전히 그때 그 멜로디로 시작한다. 한 구절, 한 구절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다. 내 안의 누군가가 아직도 이 생활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무언가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과 아직 끝내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한 자리에 엉켜 있다. 이혼은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그 경계에 서 있다. 안타깝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끝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겨울바람은 너무 차다. 이불을 꼭 그러안아 본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노을 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면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노을 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면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소녀 - 오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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