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변할 뿐이지
딸 아이의 유치원 엄마들 몇몇과 올 초부터 미술놀이를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아이들의 미술 실력을 키우자는 의도보다 대부분 외동이니 같이 어울리는 시간을 갖자는 마음이 더 컸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시간을 보냈으니까 20회 이상 꾸려온 셈이다. 그날은 지난 미술놀이를 평가하고 다음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회의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언니가 이십여 년 전 병원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도 하기 전인데 유방에 뭐가 잡힌다고 큰 병원을 가라는 거야. 이게 암이면 금방 확 퍼진다고. 유방암은 3개월 만에 죽을 정도로 빨리 퍼진대. 그래서 큰 병원에 갔는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3개월만에 안 죽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보다 울음이 먼저 터질 것 같아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진단 이후 2년 넘게 살아 있는 나의 생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큰 병원에 가서 겪은 일련의 경험담이 이어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저 사실은 2년 전에 유방암 진단받았었는데요...’ ‘저 유방암이었는데 금방 안 죽었는데’ ‘언니 놀랐겠어요. 저도 많이 놀랐거든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듣는 사람 중에 ‘3개월 만에 죽을 정도로 빨리 퍼지는 유방암’ 경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한마디에 일순간 죽음이 닥친 것처럼 불안해하는 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뭐라고 첫마디를 떼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새로운 걱정이 올라왔다. 혹시 선우 친구들이 ‘암’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선우에게 전달되면 어떻게 하지? ‘암’이라는 걸 어떤 관점에서 설명해야 하나. ‘누구나 암세포를 갖고 있어. 면역세포가 그 암을 컨트롤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다를 뿐이야’ ‘암에 걸리면 아플 수 있어. 엄마도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엄청 건강하지?’ ‘누구나 병에 걸려. 누구나 죽게 되고. 단지 각자의 속도가 다를 뿐이야’
유명 의사의 촉진 후 인턴 십여 명의 촉진이 이어졌다며 환자의 인권이 언급될 때 사람들을 흘깃 보며 지금 말할까 움찔했다가,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어. 내가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틈을 노렸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암’이라는 말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닐 때마다 얼굴이 벌게지는 것 같았다.
어느 틈에 끼어들어 어떤 말로 나의 경험을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짧은 설명에도 금세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일 년 전에 저 처음 만났을 때 머리 되게 짧았잖아요. 항암치료 때문에 빠졌다가 엄청 기른 머리였어요”라는 말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 순간은 선명하다. “네, 선우 그때 어렸죠. (...) 저 치료받을 때는 인턴들이 촉진하고 그런 적 없었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난리 나지 않을까요? (...) 그렇죠, 이십년 전이니까 유방암 걸리면 다 죽는다고 했겠죠.” 그렇게 나의 암 경험담은 마무리되었다.
발 빠르게 청중으로 돌아가 다른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선도 맞추고 고개도 끄덕였지만 조금 전의 내 목소리가 물결처럼 일렁거린 게 마음에 걸렸다.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직 잘 안 된다. 암에 걸렸다는 지난 일과 앞으로 닥칠 재발 위험은 여전히 두렵다. 약간 고인 눈물이 마르길 기다리며 용기 내어 말했던 나를 격려했다. ‘애썼어’
암환자의 일상은 보통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항암치료와 수술 그리고 방사선치료를 위해 1년간 환자 모드로 살아야 했다. 어느 해보다 길게 느껴질 사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하다가 ‘일상을 최대한 유지하자’로 방향을 잡았다. 치료 기간 동안 온통 낯선 사건들로만 일상이 채워지면 다시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출구가 막힐 것 같아 두려웠다. 오로지 치료와 회복에만 중점을 둔 환자로서의 시간만 보내게 된다면 나는 그간 살아왔던 세계에서 배제되어 ‘환자의 세상’에 갇힐 수도 있으리라 염려했다. 치료와 휴식의 시간이 늘어나겠지만 해왔던 일 중 할 수 있는 부분은 계속 해내고 싶었다.
함께 일하던 편집자들에게 몸이 좋지 않아서 일 년간 쉬겠다고 메일을 보냈지만 삼 년 이상 해왔던 계간지 담당자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원고 마감을 넉넉하게 주는 편이라 체력이 가능할 때 조금씩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딸 아이에게는 일주일이 걸리는 출장을 여러 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해두고 항암주사를 맞은 뒤 부작용에 시달릴 동안 작은 의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다음 차수 항암주사를 앞둔 사나흘 동안은 몸 상태가 괜찮았다. 베이킹이나 프랑스자수를 배우기도 하고 짧은 여행도 가고 아이의 등하원도 맡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므로 낮 동안은 친정엄마가, 밤과 주말은 남편이 아이를 돌봤다. 살림은 친정엄마에게, 나와 병원에 동행하는 일은 남편에게 할당되었다. 그런데도 내 몸 하나 돌보는 치료는 매일같이, 끼니마다, 그 사이사이 빈번하게 버거웠다. 입안은 헐어서 따가웠고 쓴맛을 느끼는 감각세포만 살아 있는 듯 모든 음식이 썼다. 안 먹으니 속은 더욱 울렁거리고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거의 매번 40도 가까운 고열에 시달렸다. 의원에서 처방하는 해열 주사로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응급실에 가서 양손과 양발에서 피를 뽑아 염증 수치를 확인해야 했다. 의원에서 퇴원할 때 여전히 항암 부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제 밥 잘 먹고 잘 웃고 산책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의사나 병원 관계자들이 말하는 ‘보편적 회복기간인 일주일’이라는 기준에 못 미치는 무거운 몸이 불만 덩어리였다.
안간힘을 썼다. 몸이 아프니까 치료받는 중일 뿐 별일 아니라고 되뇌었다. 딸 아이에게 내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아이 앞에서 ‘유방암’이란 말을 하면 안 되었다. 유방암이 금기어가 되었다. 심지어 남편과 친정엄마에게 ‘병원’이나 ‘항암’이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딸 아이가 내게 안아달라고 다가오면 남편은 ‘아빠가 안아줄게 이리와’ 했고 친정엄마는 ‘엄마 쉬어야 해’라고 아이를 말렸다. 나를 배려하는 그들에게 어느 때에는 불같이 짜증이 났다.
모자도 안 쓰고 민머리로 거실에 앉아있었는데 엄마가 친구와 함께 집에 온 순간 웃음으로 상황을 때우고 방으로 들어가 화를 삭였다. 친구가 돌아간 후 “갑자기 친구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와 “그럼 누가 올 때마다 전화해서 너한테 물어봐야 하니?”라는 말로 나와 엄마는 맞섰다. 이후 내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올라올 때까지 엄마는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유방암’을 나의 진단명으로는 인지했지만 내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괜찮아’ ‘지낼만해’ ‘치료만 받으면 되는 걸’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전 걱정 안 해요’라고 담담한 체했다. 내가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 암에 대한 두려움은 가까이에 있는 남편과 친정엄마를 향한 분노로 돌변했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을 탓하는 데에 쓰였다. 내가 바랐던 ‘일상의 유지’는 남편과 친정엄마를 억압하며 ‘유방암’을 일상에서 강제로 삭제시킴으로써 나의 몸과 마음의 실제 상태를 외면하려는 심산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의 일상’에 나와 주변 환경을 묶어두려고 안달복달했다.
일상은 언제나 변한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령 나이라든가 사는 곳, 일, 만나는 사람들, 취향, 계절 등이 바뀔 때마다 일상은 헝클어지고 재배치되길 반복한다. 나를 구성하는 수십만 개의 퍼즐 조각들은 매순간 한두 개씩, 혹은 십여 개씩 모양을 바꾸고 있다. 다만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쉬지 않고 서서히 때로는 빠른 속도로 변하는 ‘나의 일상’은 내가 건강하든 질병에 걸리든 언제나 어디에나 ‘내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 내가 반드시 유지해야만 하는 어떤 형태의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상황이 변하면 나를 위해 나의 일상도 자연스레 달라진다.
매순간 변하는 나의 퍼즐 조각들
요즘 나는 월, 화, 수요일 3일 동안 일을 하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아이의 등하원과 하원 후의 시간을 책임진다. 언니들과 아이들의 미술놀이 모임을 운영하며 가끔 커피도 함께 마신다. 아이가 수영강습을 받는 동안 밖에서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고 젤리를 사주냐 마느냐로 아이와 밀당도 한다. 주말은 상황에 따라 남편과 협의하여 꾸려간다. 일정을 소화하고 할지 말지를 결정할 때는 나의 몸 상태와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냐를 우선으로 둔다.
지난 2년여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종종 약속을 잡고 얼굴을 맞댔다. 안부를 나누며 유방암 경험담도 전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며 우는 친구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나’ 하는 과거의 동료와 ‘힘들었겠다’며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이미 재발과 전이에 대해 두려워하는 나를 알기에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노심초사하지는 않는다. 나의 감정을 내가 안다는 것은 추운 겨울날의 두툼한 머플러와 장갑처럼 든든한 힘이 된다.
암환자의 일상은 아주 먼 세계에 놓인 것이리라 짐작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뿌리째 뽑혀 저 먼 세계로 격리될까봐 무서웠다. 나와 가족을 억압하면서까지 암환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이유다. 타인의 시선과 배제를 두려워했지만 내가 먼저 암환자를 세상에서 배제한 셈이다. 과거에 알던 ‘일상을 유지하는 방법’이 내가 겪고 있는 질병의 이름과 그로 인한 나의 몸 상태를 ‘숨기는 것’이었다면 슬프고 무서웠음을 인정한 지금의 방법은 담담하게 ‘드러내기’이다.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안 해도 되고, 하고 싶을 때는 말할 수 있는 태도로 살고자 한다. 어떤 언어로 설명할까, ‘유방암 경험자’가 최적의 언어일까 틈틈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