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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06. 2018

이름을 통과한 역할로 만나리-2

각자의 방식대로 시작

나는 안부전화도 당연한 부엌 노동도 의무로 짊어지지 않은 며느리이자 그저 남편 부모님에게는 아들의 아내일 뿐인 사람이라고 외치며 꼬박 1년을 보냈다. 나는 더 이상 설거지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며느리의 의무는 없지 않느냐고 시부모에게 물었다. 시아버지는 동의했고 시어머니는 한탄했다. 10년간 며느리가 깰까봐 발뒤꿈치 들고 아침밥 지은 결과가 이 모양이라고 했다. 아들이 당신 앞에서 설거지하는 것은 볼 수 없다며, 나에게 이 집에 와서 빗자루질 한번 한 적 있느냐 되물었다. 대화를 이어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어머니가 안부전화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때처럼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는 듯이.          



부엌 노동 67년, 부엌 노동 36년     


가시 돋힌 물음표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남편은 왜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설거지를 하는가?’ ‘시아버지는 왜 어머니의 마음을 풀 열쇠가 내게 있다고 믿는가?’ ‘시어머니는 아들이 설거지하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는데 어찌하여 누군가의 딸이 10년간 설거지한 모습은 당연하게 지켜보았는가?’ 남편은 10년간 설거지를 해온 내 편을 들며 당당히 설거지를 해야 하고, 시아버지 역시 내 말이 맞고 시어머니의 태도는 잘못되었다며 내 편을 들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어머니가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이라고 세 사람을 탓하는 질문들이었다.


세 사람을 향하던 말들이 내게로 돌아온 건 여름이었다. 부글부글 끓던 내게 찬물을 끼얹은 질문과 마주쳤다. ‘왜 설거지 관두는 일을 시부모에게 허락받으려 했는가?’ 설거지를 하니, 못 하니 하는 문제는 시부모에게 동의를 구할 일이 아니었다. 시부모를 설득한 후 그만하겠다는 것은 나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마땅히 부엌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반증이었다. 나 스스로 며느리 역할이라는 갑옷을 입고 남편과 시부모에게 무겁고 답답한 갑옷을 벗겨달라고 매달린 셈이다. 옷을 입고 벗는 권한은 내게 있음을 알고서도 모르는 척했다. 내 손으로 옷을 벗으면 ‘못 됐다, 나쁘다, 밉다’고 나를 비난할까봐 겁이 났다.     


혼자 차를 몰고 충주로 갔다. 내가 세운 유리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찬밥 싫어한다고 말하면 될 걸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서러움은 화로 변했고 점점 크기가 커졌다. 찬밥을 먹자고 한 어머니만 탓했고 분노가 커질수록 어머니의 잘못도 커졌다. 어머니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내 뜻대로 해석했다. 부풀려진 감정에 대해 사과드린다. 어머니가 혼자 부엌일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그런 내 마음은 보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예쁨 받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표현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자꾸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라”는 말은 하지 마시라, 어머니의 마음이 궁금할 뿐이다.’     


어머니의 억울함을 들었다. ‘난 너한테 찬밥 먹자는 소리 정말 안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천벌 받는다. 나는 늘 네 밥을 먼저 뜨고 내 밥을 뜬 사람이다. 나는 너한테 한다고 했다. 어디 가면 자식 자랑 안 하고 며느리 자랑했다. 나는 평생 니 아버지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못해봤다,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다. 나는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 못하는 사람이다. 바라지도 마라.’      


다름을 확인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나를 격려했다. 서로 말하고 서로 들었다는 걸로 충분하다고 다독였다. 내 뜻대로 상대가 변하는 것은 기적이니까 그저 내 뜻을 전했다는 것으로 나는 가벼워지기로 했다. 사람 사이가 완벽하고 말끔하고 좋기만 할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만하면 됐다, 그동안 애썼어’ 그렇게 나를 위로하며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와 어머니 사이에 세운 유리벽을 툭 건드렸다.                



나는 내 방식대로 당신은 당신 방식대로, 시작     


그로부터 두 달 뒤 오늘, 절반쯤 허물어진 유리벽 너머로 어머니를 보았다. 11년 전 바랐던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 맺기 위해 나는 며느리가 아닌 송미연을 앞에 세워둔 채로 듣고 말했다. 송미연 뒤에 선 며느리는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도 아니요, 옆집 며느리도 아니요, 시어머니가 상상해온 며느리도 아닌, 송미연이라는 사람의 36년을 통과한 역할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시어머니라는 역할로 서든 그의 이름으로 앞에 서든 그것은 그의 몫이다.      


뒤꿈치 들고 아침밥을 짓는 게 나를 자식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의 방식이듯, 다시 묻고 다시 말하는 게 어머니를 궁금해하는 나의 방식이다. 단순하게 듣고 진심으로 말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유리벽을 깨뜨리려 한다. 그건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타박하는 선생님에게 거듭 질문을 외치는 학생처럼 산다는 것. 시부모와 남편이 ‘갈등’으로 여기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내게 대화의 단절은 곧 관계의 단절이니까.     


혼자 충주에 갔던 그 날 시어머니에게 ‘그랬구나’라는 말 한마디 못 들은 건 아무래도 섭섭했다. 그러다 다시 생각했다. 어머니가 과연 ‘그랬구나, 그런 점이 너는 속이 상했구나’라고 말씀하실 분인가? 웃음이 났다. 아니지, 11년간 내가 만났던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시지. 집 근처에 도착했다는 내 전화에 ‘뭐하러 왔니?’라고 하시곤 대문 밖에서 서성이는 분이시지, ‘많이 덥지?’라고 묻는 대신 말 없이 선풍기 방향을 내게 맞춰주는 분이시지, ‘저 좀 누워있을게요’ 하는 말에 ‘내가 언제 너 쉬지 말라고 한 적 있니?’라고 핀잔을 주며 저녁밥 하러 부엌으로 가는 분이시지. 그런 분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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