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Oct 06. 2018

이름을 통과한 역할로 만나리-1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주어진 관계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복되는 새소리와 음성녹음 안내 메시지까지 듣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몇 분 뒤 다시 걸었다. 아까 들었던 새소리가 절반쯤 지나자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몸 좀 어떠세요?” “일찍도...” “네?” “일찍도...” “일찍도 전화한다고요? 잘 안 들려요” “그래, 일찍도 전화한다” “제 전화 기다리셨어요?” “나는 이제 며느리 전화고 아들 전화고 안 기다린다. 내가 언제 너네 덕보고 살았니?” “기다리셨구나” “시어매가 벌에 쏘여서 응급실까지 다녀오고 그랬는데 그때가 언젠데 지금 전화를 하니?” “종국씨랑 통화하셨잖아요. 종국씨 통해서 듣고 있었어요.” “종국인 종국이고, 너는 너지” “부부는 하나라면서요. 꼭 같이 다녀야하고요. 이럴 때는 또 따로따로예요?” “내가 말로는 널 당해낼 수가 없다. 무슨 말을 못하겠다”     


결혼 11년차, 어머니를 알게 된 지도 그만큼이다. 그 시간을 통틀어서 오늘 내 태도가 그간 내가 간절히 바라던 어머니 앞에서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며느리 가면을 벗고 내 방식대로 듣고 말했다. 짚고넘어가야 할 것은 다시 묻고 다시 말하는 빡빡한 태도 그대로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조금 고였고 이내 미소가 번졌고 작지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머니, 두 번째 걸려온 전화 받으면 좀 나아요?’라고 속으로 물으면서 ‘김경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분은 마음이 상하면 첫 번째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곤 하시지’라고 저장해두었다. 내 마음에 그 사람의 폴더를 처음 만들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다. 남편이 일주일에 한번씩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의무감에 전화하기 싫다고 거절했다. 남편의 부탁이 계속되고 못된 며느리라는 죄책감이 버거울 때쯤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갔고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지는 내가 되어 ‘어머니이~’를 불렀다. 대체로 어머니의 첫마디는 경직된 ‘오랜만이다’였다. 어머니의 물음은 나를 채점하기 위한 인터뷰 같았다. 상냥한 며느리인 척 전화를 끊은 뒤에는 하기 싫은 숙제를 끝낸 듯 잠깐의 해방감을 느꼈다. 해야 하니까 하는 안부 전화는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그깟 30초 전화통화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의 어머니와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관계가 아니라 이름과 이름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고 싶다며 맞섰다.      


남편과 1년 살고 헤어질 거라면 1년의 평안을 위해 안부전화하는 로봇처럼 할 수 있었으나 남편과 오랫동안 잘 살고 싶었다. 내 바람대로 산다면 지금의 시어머니는 오랫동안 나의 시어머니일 텐데 억지로 가까워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끼어들면 크게 어긋나리라 예감했다. 내가 선택한 시어머니가 아니듯, 시어머니 역시 스스로 선택한 며느리가 아니다. 주어진 관계는 존중과 관찰,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믿었다.     


한 달에 한번 시가인 충주에 가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나눴다. 나는 그것으로 안부 전화를 대신했다. 가끔 남편에게서, 시어머니에게서, 내 마음속에서 의무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하고 싶을 때 걸겠다며 버텼다. 그즈음 시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 글쎄(말이다). 나는 네가 궁금하면 이렇게 전화를 하는데, 네 엄마는 안 그러잖냐” 내가 뱉은 ‘할 말 있으시면 어머니가 전화하시겠죠’라는 말을 그대로 수용해주시니 안도하면서도 놀랐다. 그 마음에 흔들려 어머니의 이름을 눌렀다. 익숙하고 뻔한 어머니의 서운함과 입술을 깨문 나의 공손함이 오간 뒤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면 먼저 전화하세요” 어머니는 내 말을 바로 튕겨냈다. “싫다. 내가 왜 하니? 네가 먼저 나한테 해야지”       

   


조용히 어긋나는 성급한 관계      


시어머니는 나와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서 속도가 빨랐다. 결혼식 후 처음 시가에 방문했을 때 ‘이제부터 엄마라고 불러’라고 하셨고 시장에서 나를 가리켜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은 ‘딸 같은 며느리’라는 내 자리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김이 오르는 뜨끈한 새 밥을 그릇에 퍼담다가 밥이 모자란 걸 알고는 ‘얘, 너랑 나랑은 찬밥 먹자’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싱크대 아래 놓인 그릇을 올려달라고 할 요량으로 남편을 부르자 ‘왜왜’ 하며 부엌으로 달려오셨다. 이내 뒤따라온 아들을 물러나라 손짓하셨다.     


어머니의 말들은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흩어졌지만 ‘딸’과 ‘찬밥’과 ‘남편은 쫓겨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부엌’ 같은 덩어리가 목에 걸렸다.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덩어리는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 삼켜도 넘어가지 않는 그것들은 유리조각이 되어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쌓여 벽을 이뤘다. 어머니의 말과 표정과 행동은 유리벽을 통과해 나에게 닿았다. 내 의도대로 어머니를 해석했다. ‘찬밥’과 ‘내게만 허락된 부엌’ 같은 조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졌다.      


10년이 흘렀다. 작년 추석, 내 옆에 서서 거품 묻은 그릇을 헹구는 남편에게 “우리 아들이 설거지를 다하네”라고 측은하게 말하는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10년간 설거지를 도맡아온 내 옆에서 10년 만에 처음 설거지를 돕는 남편은 “같이 해야 빨리 끝나지”라며 웃었다. 아무래도 며느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이름, LEE SOONHE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