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그리고 파계사의 여름
얼마 전, 오래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11시까지 갈 테니 점심이나 같이하자는 말과 함께. 마침 더위도 스멀스멀 엄습해오고 해서 흔쾌히 좋다는 말을 전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시간에 맞춰 약속한 장소로 나갔더니 선배는 모닝을 타고 왔다. 작지만 알찬 자동차라는 칭찬을 함께 나누며 우리는 팔공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2시가 조금 넘어 팔공산 입구에 도착했다. 팔공산 순환도로를 달리며 눈앞에 전개되는 녹색의 향연에 넋을 잃었다. 며칠 전 비가 온 탓도 있겠지만 팔공산이 품은 색채의 마법은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싱그러운 녹색의 빛깔로 다가왔다.
동화사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 우측으로 내려서면 계곡 위를 건너는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서면 봉화 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르다가 중간 지점에서 좌측으로 계곡을 들어서게 된다. 무더위를 피해 우거진 녹음 속에 푸른 기운이 가득한 폭포 골로 깊숙하게 들어섰다. 여름 숲 속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오롯이 마주하는 순간, 나는 진정한 휴식을 만날 수 있었다. 폭포 골은 수림과 계곡의 암반 등으로 산세가 어우러져 호젓한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거진 숲 사이로 계곡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며 사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다.
팔공산을 찾아 나선 그날도 최고 기온이 34℃로 더위가 한껏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동화사엔 곳곳에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시원한 산바람에 덥다는 느낌보다는 시원하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아마도 팔공산의 산바람과 우거진 숲길 덕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절에 가면 뭔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지어져 있고, 산이 품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포근함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대웅전에서 약사여래 대불을 지나가는 길에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로 이동하면 숲길이 보이는데, 정말 산바람이 시원하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소리에 힐링이 절로 되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서 등산을 자주 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이야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 등산 가는 것조차 꺼림칙하다 보니 동화사를 찾는 일도 자연히 뜸해졌다.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향해 등산할 때 올라가는 코스는 여럿 있지만 나는 주로 동화사를 거쳐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명산 팔공산의 봉우리인 서봉, 비로봉, 동봉, 낙타봉, 신림 봉, 갓바위 등으로 가는 코스는 어는 곳이든 제 나름의 멋을 부린 숲길을 품고 있다. 특히 한여름 팔공산의 가장 큰 매력은 초록의 숲길이 이어진 서늘한 숲 그늘에서 피서의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살짝 비라도 내려주면 그야말로 오감으로 숲의 매력을 실감할 수 있다. 더욱이 코끝으로는 청신한 숲 내음이 가슴을 뚫어주고, 발끝으로는 푹신한 흙길을 밟는 촉감이 편안한 휴식처럼 전해져 온다.
산과 들, 계곡과 숲 그리고 마을 길을 아우르는 길에는 팔공산의 눈부신 자연과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가득하다. 팔공산은 천여 년 전 왕건과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공산 동수(현 팔공산 지현동)에서 벌어진 일명 ‘동수 전투’에서 왕건은 크게 패해 오른팔과 같은 신숭겸을 잃고 멀리 안심까지 달아났다. 신숭겸은 왕건 옷을 입고 후백제 군사를 유인해 주군인 왕건을 살리고 전사했다. 이곳 전투에서 여덟 명의 장수가 전사했다고 해서 산 이름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팔공산 북지장사 가는 길은 걸어서 들어가는 게 좋다. 북지장사 가는 길의 하이라이트는 소나무 숲길이다. 북지장사 표석을 지나 걷다 보면 키가 껑충한 소나무들이 무리 지어 반긴다. 팔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인 이곳의 여름은 벌써 솔향기로 가득하다. 곧게 뻗은 소나무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을 밟고 걷다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여유로움과 함께 편안한 즐거움을 느끼며, 복잡한 일상이 누르는 마음의 짐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편히 쉬며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 끝에 북지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소박한 절이지만 대구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남지장사와 더불어 동화사의 말사를 이루고 있으며, 과거에는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만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파계사로 들어가는 길 좌우로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롯해 이름 모를 나무들이 여느 때처럼 서 있다. 파계사 매표소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완연한 숲길이 펼쳐졌다. 길 양쪽에 서 있는 나무들은 하늘 꼭대기에 닿으려는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솟아있었다. 하늘은 나뭇가지와 잎들로 채워져 하늘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의 고요함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길 아래에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했다. 계곡의 소리는 처음엔 오른편에서 들려오다 일주문을 지나고 나면 왼편에서 들려왔다. '파계사'란 이름은 바로 이 계곡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홉 갈래로 흩어져 있는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이라고 한다.
파계사를 한 바퀴 돌다 ‘가피(加被)’라는 가게 이름이 신기해서 주문대 앞에 섰다. 아메리카노를 미국 커피라고 써 놓은 작은 간판이 뜻밖의 웃음을 자아냈다. 잠깐 쉬어 갈까 하는 생각으로 냉커피를 주문하며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가피가 무슨 뜻입니까?” 아주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피’는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가피에 담긴 심오한 뜻을 알고 보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가게 옆 담벼락에는 작은 풍경에 저마다의 소원을 담아 걸어 놓은 ‘소원 풍경’이 수백 개가 걸려있었다. 나는 소원 풍경을 뒤로하고 벤치에 앉아 가피를 생각하며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음미했다. 어디선가 녹 향이 잔뜩 묻은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긋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잠시 동안이었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 가는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파계사 경내에 이르자, 바로 앞 정면 왼쪽으로 '진동루(鎭洞樓)'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 누각은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층 구조로 예전엔 이곳에서 불전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 위층은 전체가 마루로, 때로 무대의 기능을 했던 것 같다. 아래층에는 출입 통로와 창고가 있었다. 무엇보다 종횡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끼워 맞춘 부분이 건축학적으로 봐도 인상적이었다.
진동루 맞은편엔 '영조(英祖) 임금 나무'라 불리는 2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는데, 이 나무의 이름은 후대에 붙인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임금인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나름대로 말해주고 있다. 입구의 현응 대사 나무와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나무인데, 그만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계사와 영조의 인연은 숙종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계사에 주석하던 현응 대사는 왕자의 탄생을 기다렸던 숙종의 부탁을 받아 정성껏 백일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이듬해 영조가 탄생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사찰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느티나무를 골라 영조 임금 나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직은 한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날이지만, 산길을 걷는 곳곳에 서 있는 나무 그늘과 솔향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오솔길 한쪽에 서 있는 바위에는 녹색을 띤 이끼가 검버섯처럼 피어있다. 나는 오솔길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파계사의 때 이른 가을을 상상해 본다. 순간 팔공산의 많은 고찰 중 그 계절이 변하는 모습에 젖어들기에는 파계사만큼 좋은 곳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지 않아 가을이 오면 파계사를 품은 나무와 숲이 만들어 낸 풍경은 우리에게 목탁 소리처럼 은은한 운치를 전해 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