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주남저수지의 가을 추억 한 줌

자연이 내린 철새의 천국인가

by 박천수







장롱 설합 속에 묵혀둔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 정리하다 만난 낯설지 않은 사진 한 장. 주남저수지의 억새 숲을 가족과 함께 걸으며 가을 낭만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순간, 기억이 장막 속에 숨어 웅크리고 있다가 되살아난 듯 안개처럼 피어나는 추억을 고스란히 건져 가슴에 안은 채 나는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혼자서 안고 가야 할 지워지지 않는 나만의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제방길 억새 숲




밤새 내리던 가을비가 아침에는 그치고 찌푸린 하늘 아래 와룡산 자락을 물안개가 꽃처럼 휘감겨 있었다. 날마다 보는 산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신비로움을 간직한 비경처럼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등산로 옆에 자리한 작은 호수에 비친 산색이 너무 아름답다. 습관처럼 하는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같이 며칠 전부터 계획한 가족 상봉을 위해 진영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준비해 둔 선물과 몇 가지 생활필수품을 챙겨 차에 실은 후, 네비에 목적지인 ‘진영’을 찍고 출발했다. 성서 IC에서 화원 IC를 지나 구마 고속도로에 진입하였으나 도로는 생각 외로 조용했다. 청도, 밀양을 거쳐 진양으로 가는 동안 차창에 그림같이 녹아드는 가을 산색에 시선을 보내며 휴게소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진영으로 향했다.


생각 외로 원활한 도로 소통으로 일찍 진영에 도착해 주소지로 가는 길에 만난 ‘진영 감 축제’ 현수막이 우리를 맨 먼저 반겨 주었다. 진영은 창원에 속한 작은 읍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제법 활기찬 도시 기운이 느껴졌다. 빨리 가서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길을 재촉했다. 아들 집에 도착했을 때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부터 음식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아내와 나는 손녀와 한바탕 포옹의 기쁨을 나눈 뒤 한낮의 햇살이 창을 통해 거실 깊숙이 쏟아지는 식탁에 앉아 미리 차려 둔 음식을 먹으며 쌓여있던 이야기로 서로의 삶을 진단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들이 우리에게 주남저수지로 드라이브 가자고 하여 가을바람도 상봉할 겸 곧장 함께 나섰다. 집에서 저수지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걸으니 저수지 입구에 ‘람사르문화관’이라고 새겨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문화관을 직접 입장하여 관람하기는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아 휴대폰으로 직접 검색해 확인한 후, 습지보호를 위한 문화관의 역할과 기여도에 공감했다.


< 람사르문화관 >
람사르문화관은 '습지를 보전하자'는 람사르 정신을 국내외에 지속적으로 확산하고, 람사르 협약의 역사와 주요 내용을 전시 및 교육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람사르 정신에 입각한 주남저수지 보전과 친환경적 이용에 대한 지역사회의 이해를 넓히고 습지와 습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 증진을 위해 설립되었다. 람사르문화관은 제10차 람사르총회의 창원 개최와 맞추어 습지를 보전하자는 람사르 정신을 국내에 지속적으로 확산코자 람사르 협약의 주요 내용과 람사르총회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이해의 공간 마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후 람사르 정신에 입각하여 향후 주남저수지 보전과 현명한 이용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 증진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난생처음 찾은 주남저수지엔 늦가을 비가 그친 스산함 속에 철새마저 날갯짓을 멈추었는지 고요한 정적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저수지 가운데 두 그루의 잎 진 나뭇가지 위엔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새들의 작은 몸짓만 보일 뿐이다. 산책로에는 끝없이 이어진 억새숲이 사람들의 정감을 일깨우며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억새 군락은 마치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경계선처럼 저수지와 제방 사이를 따라 이어져 있다. 저수지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이곳까지 찾아오면서 지친 여독에 날개를 접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탐조객 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사진작가들은 망원렌즈를 장착한 사진기를 고정한 채 숨죽이며 철새들의 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새의 휴식


겨울이면 철새들의 고향이라며 자주 듣던 주남저수지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행이란 언제나 계획 없이 떠날 때 추억은 더욱 깊이 쌓이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주남저수지 또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손녀의 손을 잡고 사람 키보다 큰 억새와 갈대숲, 그리고 코스모스까지 무리 지어 피어있는 제방길을 걸으며 가을 속에 흠뻑 젖어들었다. 탐방로에 설치된 탐조대에 오르니 주남저수지와 뒤쪽 백원산의 자태가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다. 자연이 빚어내는 신비로움에 숨을 죽이고, 다양한 철새들을 관찰하는 특별한 체험까지 하면서 주남저수지의 풍경에 취한 채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재두루미의 유희


주남저수지는 우리나라 겨울 철새 탐조 일번지로 알려져 있지만, 늦가을부터 나들이객과 탐조객들이 몰려다녔고, 사진작가들이 주요 포인트를 찾아 포토존에 망원렌즈를 설치해 놓은 채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내겐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멀찌감치 저수지 복판 모래톱에 모여 가을 햇살을 즐기는 고니, 재두루미, 혹부리오리, 큰 기러기들은 사람들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날았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등치가 있는 고니들은 물 위에 고요히 떠 있거나 외발로 선 채 고개를 날갯죽지 밑에 박고 미동도 하지 않는 채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직접 보니 너무 신기했다. 주남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환경이 사계절 내내 철새의 천국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면서 나 자신도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넘쳐흐르는 감정의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 진영을 찾은 것은 십일월 초에 아들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의 생일이 이틀 사이로 끼어있어, 얼굴도 보고 선물도 전해 줄 겸 해서였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하나뿐인 자식들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꼭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선물이란 것이 본래 해주면 마음이 편하고 안 해주면 한참 동안 찜찜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일 것이다. 각자의 생활이 따로 있다 보니 평일엔 만나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휴일에나 볼 수 있으니, 내가 내려가거나 아이들이 올라오거나 할 수밖에 없다. 막상 얼굴을 보면 반가움도 잠시지만 그래도 몇 주 동안 안 보면 그리워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이 삶을 채워가는 가족의 끈끈한 사랑 아닐까?


주남저수지를 돌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그냥 떠나기 아쉬워 저수지 옆 길가 조용한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 맛이 좋기로 많이 알려진 곳이라 한다.

‘베니 베니(benybeny)’라던가?

전망이 좋은 2층에 올라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캐러멜 마끼야토, 와플 등으로 산책에서 온 피로를 풀고 나오니 어느 듯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저수지 반대편에 있던 한 무리 큰 기러기들이 대열을 이루고 급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낮 동안 쉬다가 쌀쌀해지는 밤을 보내기 위해 저녁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길인가? 새들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날갯짓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가 보다.


저수지에 황혼이 지는 장관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가벼운 인사를 뒤로하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언젠가는 함께하는 사랑이 있어 더욱 아름답게 느꼈던 주남저수지의 늦가을 풍경을 추억하겠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사의 어느 여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