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쉽게 떠날 수 없는 아름다운 여행
여행은 인생을 배우는 최고의 체험현장 아닐까?
여행의 매력은 자유로운 자기만의 취향대로 새로운 세상과 만나 모험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데 있다. 떠나기 전의 두려움을 훌쩍 털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난히도 무덥던 ‘대프리카’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채 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규칙적인 일상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일탈은 하나의 외도였다.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몇 일되지 않았는데 울컥 가슴이 아려왔다. 삶의 방향이 나침판을 잃은 듯 좌우로 흔들렸다. ‘외로움 때문인가?’ 여백의 시간에도 멋 부리지 못한 삶에 가끔은 쉼표를 찍고 싶었다.
외동아들을 둔 나에게 사돈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결혼 전에 사돈과 대구 시내 한정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사돈 하면 친구처럼 지냅시다.’라고 내가 먼저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어려운 자리였지만 첫 만남부터 소탈한 사돈의 인간성에 이끌려서 동질감을 느끼며 내 안에 가두었다.
사돈 관계로 맺어 진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모두 현직에서 은퇴하여 가사도우미와 작가 수업에 심취하여 각자의 생활에 정진하고 있다. 사돈은 20여 년간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애완견 뒷바라지에 바쁘고, 나는 캘리그래피와 수필창작 등 새로운 취미 만들기에 열중이다. 은퇴 후 공허함에 노출된 자신의 삶에 익숙해져 가면서 전화 연락조차 뜸해져 갔다.
처음 사돈과 대면했을 때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의 의미가 자꾸만 소원(疏遠)해져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사돈과는 한 살 터울 사이지만 편안한 나의 거울 같은 친구로 남아 주기를 원했다. 며칠 동안 생각의 피라미드를 쌓으면서 선택한 카드는 여행이었다.
‘행여 이유도 마땅치 않은 핑계를 대며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지?’
예상치 못한 의견 제시와 답변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용기를 내었다.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선택에 대한 갈등이 몇 번이고 부딪쳤다.
“사돈, 오랜만입니다. 갑작스레 전화드려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단둘이서 기차여 행 한 번 갔으면 싶은데 사돈 생각은 어떤지요?”
끝말은 흐렸지만 돌발적인 나의 제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돈은 잠시 머뭇거린 듯하다가 곧바로
“함께 떠나면 나는 좋지요.”
라며 토하나 달지 않고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이와 함께 쌓여가는 외로움에 동조하며 곁을 내준 사돈의 배려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린 부산여행의 환상을 안은 채 여행 일정을 정하고 동대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튿날 10시 정각에 출발하는 부산행 열차표는 앱으로 미리 예약해 두기로 했다. 기차 시간에 맞춰 내가 도착했을 때 사돈은 이미 대합실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병대 출신답게 사돈은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키는 매너를 가진 분이다. 악수로 인사를 대신한 후 편의점에서 작은 생수병 하나씩을 사서 챙겼다. 대합실을 빠져나온 우린 부산행 열차 승차장을 향해 에스카 레이트를 타고 내려갔다.
상·하행선 철로가 좌우로 뻗어있는 승차장 내 고객대기실에 잠시 앉아 열차를 기다렸다. 짧은 대기시간이었지만 처음 함께 떠나는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벌써 몇 번씩 들은 영양가 없는 과거사의 늪에 푹 빠졌다. 오래 숙성된 술과 같은 인생사 속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수에 취해 열차에 대한 생각은 마비되어 갔다. 부산행 10시 열차가 동대구역 프렛 홈을 출발하고 나서야 우린 스프링처럼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오며 멍한 혼란 속에 빠졌다.
한여름의 더위가 열차 레일 위로 나직하게 퍼지며 바람에 섞여 몸속으로 전달되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황당한 사실 앞에 서로가 미안함으로 두 손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출발하는 다음 열차를 타기 위해 뛰다시피 승차권 발매창구로 향하면서 세월의 무게로 낮아진 서로의 등을 어루만졌다.
발매창구에서 승차권을 반환하고 위약금을 물고 난 후 다시 승차권을 발급받았다. 오전 10시 30분 KTX 열차. 어이없이 놓쳐버린 열차 시간이 머릿속에 계속 남아 몸과 마음이 긴장되었다. 사돈은 연신 시계를 보며 조급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구내 안내 방송이 들리고 이어 도착한 KTX 열차에 오른 후에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낮의 햇살이 차창을 통해 얼굴 가득 와 닿았다. 커 텐을 치고 눈을 감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눕혀 잠을 청하였다. 옆 좌석에 앉아있는 사돈은 조금 전 일에 대한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머리만 뒤척이고 있었다. 열차에 탑승한 지 50여 분이 지나갔을 때쯤 잠시 후에 부산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부산역 광장은 도시재생사업으로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 우린 오늘 하루의 여행 테마를 ‘부산 3대 시장의 먹거리와 볼거리’로 잡았다. 어렵게 시도한 여행이었지만 스케줄은 너무 단순했다. 그러나 시장탐방은 약간의 방향을 잃은 것 같은 내 삶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삶의 비애가 느껴지며 마치 인생의 괄호 밖으로 튕겨 나온듯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새벽시장을 찾아 현장의 열기를 피부로 느끼며 힘을 얻던 그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밤이 낮인 듯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가던 방황하던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우린 먼저 자갈치 시장으로 가기 위해 편리한 지하철을 이용했다. 부산역 다음 중앙, 남포에 이어 세 번째 역이 자갈치였다. 자갈치역에 내려 안내도를 따라 시장 방향 출구로 빠져나왔다. 시장에 도착하자 해안과 맞닿은 넓은 주차장과 검푸른 바다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바다 냄새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출항 대기 중인 여객선과 어선이 바다 위에 정박하고 있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시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선착장 인근에는 상인들이 외쳐대는 호객 소리가 비린내에 섞여 공중으로 퍼져 나가고, 사람들의 활기찬 몸짓과 고성에서는 삶의 깊은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시장 난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충무 횟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인정을 쏟아내는 종업원을 따라 얼떨결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물 회를 주문할까 망설이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고등어 생선구이와 함께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노릇한 빛깔로 치장한 고등어구이와 매운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반주까지 곁들이고 나니 천하가 눈 아래 보이는 듯했다.
충무 횟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국제시장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우측 시장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장 중앙에서 골목길로 돌아가자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사진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2014년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한 ‘꽃분이네’ 가게 앞이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잊힌 향수를 새삼 느꼈다. 시장 골목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기웃거리다 보니 시장탐방 자체가 여행의 또 다른 별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국제시장 건너편이 깡통시장이다. 국제시장을 속성으로 한 바퀴 돌다 보니 약간의 허기가 찾아왔다. 우리는 시장 입구에서 종이컵에 담아주는 ‘씨앗호떡’을 하나씩 손에 들고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호떡을 한입 물면 곧바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꿀물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핥아먹는 사돈의 모습이 재미나고 우스꽝스러웠다.
“사돈, 참 재미나게 드십니다.”
“이렇게 먹는 게 차음이라 부담스럽네요” 라며 호떡을 먹다 말고 사돈은 껄껄 웃어넘겼다.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온갖 먹거리가 차려진 시장 풍경은 마치 대형 제사상 차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갖가지 색상으로 장만해 놓은 음식은 색다른 눈요기와 재미를 함께 주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생한 삶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시간이 더없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시장은 언제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에너지원이 아닐까 싶다.
시장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한 에너지로 삶을 재충전하고 싶은 욕망이 몸 안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돈의 따뜻한 손을 꽉 움켜잡으며 시장 분위기에 걸맞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돈, 우리도 남아있는 삶의 활력을 위해 이곳에서 재충전해 갑시다.”
우리는 온몸에 삶의 열기를 잔뜩 품은 체 시장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시장에서 무상으로 받은 에너지로 걷고 싶은 충동이 꿈틀대며 일어났다. 부산의 도시디자인이라도 한번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 부풀었다. 역까지 걸어가면 대략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 사돈, 부산역까지 한번 걸어가 볼까요?”
장시간 시장 골목을 돌며 체력을 소모한 사돈에게 막상 걸어가자고는 했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에 억지를 부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도보여행을 시작한 지 20여 분이 지났을까 다리가 천근만근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돈, 많이 힘들죠? 괜한 소리를 해서 생고생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같은 입장 아닙니까?”
“목도 마르고 다리도 힘들고 하니 어디서 잠시 쉬어갈까요?”
나도 그렇지만 사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쉬어 갈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길 왼편 2층 건물에 커피숍의 간판이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우리는 같은 곳을 동시에 가리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커피숍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철로 폐목을 깔아 만든 고풍스러움으로 인해 깊은 운치와 함께 정겨움을 더했다.
커피숍 안은 품격이 느껴지는 잔잔한 피아노 클래식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2014년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연주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클래식 음악엔 좀 약하지만 그때의 감명이 깊어 여러 번 들은 기억이 있어 금방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아련해지는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협주곡은 마음의 휴식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음은 분위기에 취했지만 몸은 한꺼번에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목마름과 피곤함으로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주인의 취향인 듯 탁자 양쪽에는 검은색 가죽 의자가 중후한 무게로 마주 놓여 있었다. 우리는 지친 몸을 가죽 의자에 한껏 젖히고 누운 채 팥빙수를 주문했다. 얼음 가는 소리가 들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 위에 팥을 먹음직하게 올려놓은 팥빙수가 도착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식 팥빙수를 연상하며 한 스푼 듬뿍 떠 입에 넣었다. 시원함과 단맛의 어울림이 온몸으로 전해지며 뭉쳐있던 피로가 빙설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돈, 정말 행복합니다. 사돈 덕분에 뻑뻑한 삶에 활기찬 에너지와 향기를 듬뿍 담아갑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정말 낯설게 떠나온 오늘 여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겁니다. 함께해서 감사합니다."
겸연쩍은 미소를 담은 표정에서 고맙다는 인사가 녹아있는 끈끈한 우정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팥빙수를 천천히 먹으면서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고상한 품격이 느껴지는 중년의 주인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두 분 선생님은 이곳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아~ 네, 대구에서 왔습니다. 자식들 인연으로 만난 사돈관계지만 서로가 오래도록 친구처럼 곁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 하루 시간을 내어 이렇게 함께 여행 왔습니다."
“와, 정말 멋지십니다. 사돈 관계는 정말 어려운 사이인데 이렇게 함께 여행도 하시고, 너무 부럽습니다.”
주인의 부럽다는 말에 약간의 으쓱함을 느끼며 감사의 인사도 함께 전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시원한 팥빙수의 달콤함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무거웠던 다리의 피로감도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아 처음 떠났던 곳으로의 회귀를 위해 부산역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산역 광장에 오후의 햇살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하늘엔 몽글몽글 피어오른 구름이 바람에 너울대며 두둥실 춤추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듯 사뿐히 움직이고 있다. 만남과 떠남이 공존하는 역 대합실 벽면에 걸린 전자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며 승차 시간을 재촉하고 있다.
쉼표가 필요한 삶의 내리막길에서 사돈과 함께한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역 광장 분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거센 물줄기가 음악 속에 묻혀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마치 사돈 간의 낯선 동행을 위로하는 작은 축제의 함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