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기대, 그리고 꿈의 실현
오래된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있는 유럽여행을 다시 펼쳐내어 글로 쓴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행복이다. 다시 가고픈 설렘을 접어두고, 지나간 시간 속의 발자취를 따라 그날을 회상하며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5개국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과 향기를 찾아 나선다. 꿈으로만 동경하던 나의 감격적인 여행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정확히 1996년 10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라한 추억 속에 잠들어 있는 그때 그날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고, 작고 낡은 수첩 속에 갇혀있는 메모 속의 숨은 이야기와 변색된 오래전 사진을 들고 한 발 한 발 나를 부축이며 조심스럽게 이 글을 쓴다.
1996년 당시 나는 **자치단체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때는 이곳저곳에서 세계화 바람이 한 창 불던 때였다. 각 지방자치 단체마다 유럽 선진국의 생활문화와 각종 제도 등의 비교 견학을 통해 우수한 시책을 행정에 반영하고자 하는 정책이 만연해 있을 때이기도 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자치단체에서도 ‘5년 이상 근속하고 해외연수 경험이 없는 자 중에서 모범 공직자로 부서장이 추천하는 15명’을 선정하여 해외연수를 실시하였다. 정말 행운의 여신이 도왔는지는 몰라도 나도 그 일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해외연수의 기회를 붙잡았다. 기간은 1996년 10월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10박 11일간이며, 연수 국가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5개국이었다.
연수 대상자들은 해외연수에 따른 여권발급과 함께 보안 규정, 여행자 수칙 및 개인 준비사항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특히 기본 준비물과 해외여행 기본예절에 대해서는 우리를 인솔하는 여행사에서 유인물을 통해 별도로 안내를 하였다. 기본 준비물로는 소형 가방, 옷(점퍼, 캐주얼, 운동화), 세면도구, 화장품, 슬리퍼, 상비약, 카메라, 필름, 전자계산기, 필기도구 선글라스, 우산, 면장갑 등이었다. 또한 여행 기본예절에 대해서는 기내, 관광지, 레스토랑, 호텔, 화장실 등 장소에 따른 준수사항을 강조하였으며 심지어 호텔이나 식당, 현지 가이드와 운전기사에 대한 팁까지도 알려주었다. 우리들은 하나하나 열심히 체크하고 익히면서 낯선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처럼, 여행하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가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터니까.
출발 당일은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 우리는 오전 11시 30분까지 대구 공항에 집결하여 인원 체크 등을 끝내고, 12시 30분 대한항공 KE506 편으로 대구를 출발하여 김포공항으로 가는 것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공항은 평소 자주 이용하는 곳이 아니기에 낯설었지만, 꿈에만 그리던 유럽 5개국 해외연수라는 명제 앞에 설렘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비행기는 7분 늦은 37분에 대구 공항을 이륙하여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해외여행이라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기내에서 나는 뭉클하는 색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비행기가 귀에 익숙한 굉음과 함께 서서히 활주로를 이륙하여 하늘을 향해 고도를 높여갔다. 묘한 긴장과 함께 양쪽 귀가 막힌 듯 멍멍해져 오고 답답함을 느꼈다. 오른쪽 좌석 타원형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멀리 팔공산 자락의 단풍이 붉게 불타고 있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검붉은 채색의 산과 누런 볏 집단을 늘어놓은 들녘이 함께 어울려 평화로운 마을의 가을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늘은 희뿌연 안갯속에 묻혀 있고 가끔씩 보이는 청회색 하늘가엔 구름만이 나다닌다. 불타는 가을 산빛을 감상하는 가운데도 귓전엔 비행기의 엔진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40분 후였다. 도착 후 우리는 재빠르게 국제선 제2청사로 이동하였다. 아침도 채 먹지 못하고 온 터라 공항 식당에서 김치 어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때우고 출국에 앞서 준비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리고 건전지 등 소모품 몇 가지를 추가로 구입하여 준비물에 넣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했다. 탑승 수속 시 여권과 함께 제시해야 하므로 작성한 후 여권에 끼워 넣었다.
항공사 탑승 수속은 타고 갈 항공사의 수속대를 찾아가서 가지고 있는 예약 쿠폰을 여권과 함께 제시하고 탑승 티켓을 받아야 하지만 여행사에서 단체로 일괄 처리하여 주니 서두르지 않고 마음이 편했다. 기내에 들고 탈 작은 가방 외에 큰 것들은 수하물 위탁증을 받은 후 화물칸으로 보냈다.
탑승 시간이 다 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대한항공 KE907편 런던행 항공편의 탑승을 시작합니다.” 김포공항에서 16시 30분, 우리는 유럽 5개국 테마 여행을 위해 런던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 활주로를 이륙해 굉음과 함께 솟아오르는 동체에서 위압감마저 느꼈다. 희뿌연 안갯속에 런던을 향한 비행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운다. 비행 고도가 올라갈수록 어쩌면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포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16시 50분, 고도 31,500피트(9,500m), 외부 기온 영하 47℃, 속도 842km/h.
지금 비행기는 망망대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지구의 어디쯤일까? 괜한 설렘에 마음은 무념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슈벨트의 ‘세라나데’을 듣는다. 고고한 음률에 기분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이 아닌 현실을 그려본다. 영국 런던을 향한 13시간의 비행은 내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이며, 새로운 발견을 위한 전초전이자 선진행정의 시금석이 될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을 기대하며 영국을 잠시 떠올려 본다.
‘영국은 과연 신사의 나라인가?’ 책을 통해 배운 인식의 고정관념, 그것은 과연 올바른 생각일까?
17시 30분. 보이는 것은 마냥 구름뿐이다. 비행기의 동체는 런던으로 가고 있지만, 기내에서의 느낌은 움직임이 없이 그냥 고정되어 서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다. 기내 방송을 통해 여객기는 서해를 거쳐 중국을 지나 시베리아 상공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현재시간은 18시 50분, 35,000 Feet(10,700m), 시속 820km/h, 외부 기온 –56℃.
어디쯤일까? 중국의 넓은 대륙을 횡단하여 비행하고 있다. 아래 보이는 것은 사막 같은 평원이다. 상상도 못 한 현실 앞에 감개무량함을 다시 느껴본다. 비행기는 서울 서해를 거쳐 중국 천진, 북경을 통과하여 몽고의 울란바토르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아래로 바라보니 설산(雪山)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다 기내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그냥 감상하기로 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가족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는 줄거리의 영화로 모처럼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 현재시간 19시 20분.
고도 39,000피트(11,900m), 현재 속도 907km/h, 외부 기온 –57℃, 도착 예정 시간 20시 50분, 남은 시간 1시간 30분.
비행기는 러시아 산맥을 지나 발트해 상공을 거쳐 암스테르담과 북해를 지나 런던에 도착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 한국은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다. 아내와 아들이 생각났다. 갑자기 보고 싶은 마음으로 잠시 울컥해져 오는 마음을 달래 본다. 장시간 비행이라 배가 출출하여 간단하게나마 벌써 기내식 식사를 2끼까지 다 먹었다. 간간이 술과 음료수를 먹을 수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의 술 코냑, 위스키, 보드카, 맥주 등 대부분을 기내에서 서비스받을 수 있었다. 기내에서 먹고 마시고 앉아 있으니 속이 영 불편하다. 여객기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다. 승객들도 피곤함에 지쳤는지 모두 다 자기만의 포즈로 기대어 잠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말 기내에서 보내는 13시간의 비행은 피곤한 여행이다. 그래도 이제 곧 런던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은 가벼워졌다.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승객들께서는 좌석벨트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반가운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창문 덮개를 열고 밖을 보니 점점 가까워지는 런던 시내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긴 여정을 끝내고 비행기는 정확히 런던시간으로 20시 50분에 히드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우리나라와 9시간 늦은 시차 때문이다. 히드로 공항은 세계 3대 공항 중의 하나로 1~4번까지 4개의 터미널이 있으며, 아시아 미주 등의 노선은 3번 터미널을 이용한다고 한다. 공항에는 1시간에 16대가 도착할 수 있다고 하니 세계적인 공항임엔 틀림없다. 우리는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여행사 현지 안내원을 따라 버스로 숙박지인 브리타니아(Britannia)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템즈강 강변도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유럽에서의 감격적인 첫날밤을 맞이하였지만, 장시간의 비행 여독으로 모두가 샤워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유럽 여행 1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