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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Nov 29. 2020

여행의 회상(5) /파리 3일째, 프랑크푸르트

프랑스와 독일, 문화의 차이를 보다




# 1996년 10월 26일(토) 프랑스 파리     


여행 5일째, 새벽 6시에 모닝콜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 세수 후 옷과 가방을 챙기고 아침 7시에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했다. 딱딱한 빵과 햄, 치즈, 과일에 우유를 곁들여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숙소로 들어가 간단하게 양치를 한 후 휴대용 가방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아침 0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파리 시내를 관광하고, 13시 20분에 파리를 출발하여 14시 40분에 독일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하여 관광을 계속하는 것으로 대충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09시 40분까지도 현지 가이드가 오지 않아 가이드가 기다리는 시내 쪽으로 전용차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그런진 몰라도 도심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 5일 근무제의 영향인 듯하다고 한다. 도심은 비어있었고 사람들은 외곽지 숲이나 드라이브, 골프 등으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오직 휴가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우리는 시내에서 가이드를 만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아침 일찍 고성으로 유명한 벵센느 성으로 향했다.      


벵센느 성에서 보는 감옥의 그림자

벵센느 성은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기간 동안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전략적인 성채이다. 가운데 있는 동종의 높이는 50m로 중세시대엔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건물은 왕가의 요새 겸 주거지로 사용하였으나 그 후, 왕가의 주거지 기능을 상실하고 혁명 기간에는 무기 창고와 감옥으로 쓰였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이곳의 군사 기구적 역할을 좀 더 강화시키기 위해 탑 주변을 평평하게 만들면서 지금의 정비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벵센느 성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곳은 감옥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범, 사상범, 종교범 등과 같이 주로 상류층 범죄인을 가두던 곳이다. 벽에는 수감자들이 그린 벽화나 글귀들이 보였다. 특히 아침에 비치는 햇살이 창문 옆에 새겨진 글씨까지 비춘다고 한다. 왕들의 사냥터였던 벵센느 숲은 현재 파리 시민들의 여가생활을 즐기는 커다란 공원처럼 변했다. 서쪽의 블로뉴 숲과 동쪽의 벵센느 숲이 파리의 더러운 공기를 씻어 주는 공기 정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벵센느 정원

우리는 빙 센느 성을 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의 모든 관광을 끝내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위해 파리 샤를 드골공항으로 이동했다. 파리에서의 3박 4일간의 감명 깊었던 시간이 필름처럼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는 아쉬운 추억을 남긴 체 샤를 드골공항 13시 20분발 에어프랑스 AF1404 편으로 프랑크푸르트로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 20분이 경과 한 14시 40분 우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 1996년 10월 26일(토)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의 정식 명칭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독일의 관문이며 유럽 제2공항이다. 짙은 안갯속에 가랑비가 왔다 갔다 한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은 현재 우리나라와는 7시간의 시차가 발생하지만 내일 오후 3시면 서머타임이 해제되니 1시간 당겨 주기 바란다는 안내도 놓치지 않았다.  


아우토반

우리를 태운 전용 차량은 독일에서 유명한 아우토반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토반은 독일어로 ‘아우토(자동차)’와 ‘반(선로, 도로)’의 합성어로 자동차로 분류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아우토반은 고속도로지만 속도가 제한이 없으며 통행료도 없고 오토바이도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로서 14,000km나 된다. 3,700km는 히틀러가 전쟁 준비로 건설했다고 한다.     

아우토반

아우토반은 동서로 달리고 있고,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급정거한 스키드 마크는 보기가 힘들었다. 고속도로의 주변 경관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끝없는 밀밭과 추수를 하였는지 황금물결의 벌판이 한 폭의 그림 같이 다가오고, 건초를 커다란 카펫 말듯이 크게 말아 군데군데 모아 둔 풍경도 보였다. 가을이 물씬 익어가는 고속도로 주변엔 숲이 자욱하게 우거져 도시의 정감을 더욱 살려주고 있었다.



 

금융산업의 중심도시 프랑크푸르트  

오늘 우리가 견학할 프랑크푸르트는 라인강 지류인 마인(Main) 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는 독일의 교통, 경제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와 대관식이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거행될 만큼 19세기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실질적인 독일의 수도였다고 한다. 유럽의 학자들은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프랑크푸르트를 치켜세운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전용버스가 중앙역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자 프랑크푸르트가 독일 경제의 중심 뿐만 금융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로 타워엔 EU의 상징인 조형물이 돋보이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유럽 중앙은행이 있어 EU의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시가지의 인상은 파리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파리와는 달리 현대적이고 아름답게 각이 잡힌 고층 건물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옛 건물들과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어 한마디로 세련된 도시 모습을 깆추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는 런던, 파리와 함께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5번째로 큰 도시로 국제적 금융 도시 뱅크 푸르트라고도 불릴 정도로 금융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또 독일의 교통, 산업, 박람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유명한 산업 도시답게 유명한 세계적 기업들과 은행들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쇼핑센터들이 한자리에 잔뜩 몰려 있어 쇼핑하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현대백화점 같은 게 한 서너 개가 붙어 있고 기타 쇼핑몰들도 한 스트리트에 다 어우러져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도시가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아 쾌적한 느낌이었다. 은행건물이 즐비한 시내를 지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등의 작품을 남긴 세계적인 대문호 쾨테의 생가로 향했다.




괴테 생가에서 느껴보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의 생가는 괴테가 26세까지만 살았던 곳이었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괴테가 잠시 머물렀던 곳마저 그가 쓰던 소도구 책상과 그 외 몇 가지만을 내 걸고는 괴테하우스라 이름 붙여 놓고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유럽인들의 관광사업에 대한 마인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궤테 생가

괴테는 여러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도 괴테하우스가 있으나 그의 생가는 프랑크푸르트였다. 황제의 고문관이었던 아버지와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괴테는 출생부터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카이저 거리 뒤편에 있는 괴테의 생가는 2차 대전 중 전파되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폭격을 대비하여 유물은 모두 대피를 시켰다고 한다. 전쟁 후 프랑크푸르트 시는 괴테의 생가를 이전과 다름없이 복원하여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4층으로 이루어진 괴테의 생가에는 당시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18세기 독일 부잣집의 생활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생가는 전형적인 독일 도시형 가옥으로 생각보다 그리 큰집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그 정도 경제 규모를 가진 가정에서 교외에 지은 집들은 마당도 아주 넓고 방의 크기도 매우 크지만 아무래도 시내 한복판이니 그리 크게 지을 수 없었나 보다.

괴테 생가의 유물

생가는 괴테가 1949년 태어난 집이고 26살에 바이마로 가기 전까지 문학가로 처음 이름을 날린 곳 이이기도 하다. 괴테의 시 가운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불후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시대를 초월한 이루지 못한 사랑과 자살로 끝을 맺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선명하기 남아 있다. 괴테의 명성에 비해 생가는 별로 구경할 게 없는지 관광객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 왔다가 조용히 밀려 나간다. 우리도 괴테의 생가에서 나와 프랑크푸르트의 랜드마크라는 뢰머광장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의 랜드마크인 뢰머 광장 

쾨테의 생가를 나와 마인강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뢰머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뢰머 광장은 로마인의 광장이란 뜻으로 이곳 카이저 돔 성당에서 로마 황제가 즉위식을 하고 타운홀에서 축하연을 베풀던 곳이었다. 서울시청광장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며 항상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관광의 필수코스로 꼽혔다. 뢰머 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중세 건축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광장 중심에는 유스티티아 동상과 분수대가 있으며,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은 왼손에는 정의의 기준을 상징하는 저울을, 오른손에는 엄정한 심판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었다.    

뢰머 광장

독일의 대도시는 오래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 이유는 1,2차 대전 때 연합군이 로켓을 발명하여 바다 건너 런던을 공습할 때 프랑크푸르트 역시 연합군의 반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뢰머 광장도 2차 대전 이후 새로 복구되었지만, 현재는 프랑크푸르트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던 대성당, 아름다운 구시청사, 유스티치아 분수, 니콜라이 교회 등 프랑크푸르트의 옛 모습을 한자리에서 몽땅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뢰머 광장이었다.


뢰머 타운홀은 로마 시대에 지어져 황제가 즉위식을 한 후 연회를 베풀던 곳이며, 2차 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시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했다. 가운데 보이는 테라스에는 유명인사들이 올라가 연설을 했다고 하는데 현대에 들어 그곳에 올라가 본 사람이 몇 안 되는 가운데 차범근과 차두리 부자가 올라가 화제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곳 프랑크푸르트를 폴란드 국경에 있는 작은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구별하기 위해 '마인강변의 프랑크푸르트'라고 불렀다.    




카이저 돔 성당

뢰머광장에서 나와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으로 이동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뢰머광장 뒤편 마임 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성당의 정식 명칭은 바톨로메오 돔이지만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던 곳이라 '카이저 돔(황제 성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선출되고 대관식이 이루어졌던 유서 깊은 대성당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도시의 대성당에 비해서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카이저 돔 성당

카어저 돔은 교황이 성 바르톨로메오의 해골을 성물로 보내면서 성 바오톨로메오에 헌정된 교회에 해당하는 성당이지만, 역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대성당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카이저 돔 성당은 높이 95M의 종탑으로도 유명하며, 성당 종탑에 올라가면 프랑크푸르트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유럽 여행 중에 많은 성당 종탑들은 시간이 있으면 올라가 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거의 모든 도시의 건축법이 성당 종탑을 기준으로 하여 그 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도시의 전망을 보려면 바로 성당 종탑에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성당을 둘러보는 것에 조금 식상한 느낌도 가졌지만 견학일정에 늦은 감이 있어 유서깊은 성당이었지만 외관만 눈으로 확인한 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젤너 다리 난간을 채운 사랑의 열쇠

아이 젤너 다리는 철재 빔으로 만든 다리로 라인강의 지류인 마인강을 지나는 다리 중 유일하게 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난간엔 정말 많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세계 유명 여행지의 다리나 난간에서 사랑의 열쇠를 찾는 것은 이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리에 빼곡히 채워진 사랑의 열쇠를 보며, 이곳이 데이트 장소로도 손색없는 곳임이 느껴졌다.    

아이 젤너 다리

자물쇠 거는 문화는 동서양이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녹 쓴 자물쇠를 보니 어쩌면 유럽에서 먼저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물쇠에 자물쇠를 걸고 또 걸고 하여 마치 포도송이처럼 엮여 있는 것이 조금은 흉물스럽게 보였다. 다리 자체는 딱히 아름답다는 느낌은 없지만, 마인강의 전망대 역할도 하면서 밤이면 프랑크푸르트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아이 젤너 다리 입구 바로 앞에는 프랑크프루트 역사박물관이 있다. 시계탑의 모양이 동화 속에 한 장면 같았다.


아이 젤너 다리에서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마음 속으로 집에 있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뭉클 들어왔다. 이제 5일째 여행인데 벌써 그리움이라니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닐까. 젤너 다리 난간에 사랑의 열쇠라도 하나 걸어 놓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쉬운 미련을 남기며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하루의 여정을 끝내고 호텔로 가는  안에서 피곤이 한꺼번에 엄습해 옴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보니 어둠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 인근에 있는 한식 전문식당으로 향했다. 모두  뜨끈뜨끈한 곰탕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내일 여정의 재충전을 위해 각자의 휴식공간으로 찾아들었다. 몇몇이는 사우나로, 몇몇이는 라이브 쇼를 구경하러 간다고 하면서.    





유럽 여행 5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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