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고성의 품격을 만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간단하게 식사 후 가방 등의 짐을 챙겨 버스에 싣었다. 아침 9시 버스에 올라 하이델베르크를 향해 출발하였다. 프랑크프루트를 시가지를 빠져나와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아우토반은 왕복 4~8차선의 고속도로로 시원스럽게 뻗어있었다. 고속도로 양측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끝이 보이지 않고 가끔씩 스쳐가는 농촌 주택들은 아름답고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끝이 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평야를 바라보며 1시간가량 달려 하이델베르크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하이델베르크는 한눈에 보아도 조용하고 고색 찬연한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붉은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중세풍의 건물들은 도심을 흐르는 네카어 강과 울창한 숲이 어울려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풍기며 다가왔다. 하이델베르크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여행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독일의 오래된 성을 찾아가는 고성 순례가 유명했다. 만하임에서 시작되는 고성 가도는 하이델베르크, 네카어 계곡, 로텐부르크를 지나 뉘른베르크까지 250㎞가량 이어지는 중세의 길로, 이 낭만적인 가도의 중심에 있는 도시가 하이델베르크라 했다. 우리도 다른 여행객들과 마찬가지로 고성 순례에 동참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황태자의 첫사랑'을 환상하며
하이델베르크의 고풍스러운 풍광은 정말 아름답다. 향기로운 바람과 보리수나무의 멋스러운 모습에 눈을 뗄 수 없다. 너무나 아름다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어 강이 흐르고 있었다. 구시가지는 네카어 강과 고성의 산기슭에 가늘고 길게 퍼져 있었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적 도시로 손꼽힌다. 네카어 강을 내려보며 산 아래 언덕에 위치한 고성과 그 아래 예쁘게 자리 잡고 있는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조화에 빠져 넋을 잃을 지경이다. 예부터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는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구상하기도 했던 곳이다. 고성의 언덕 위에서 바라본 안개 낀 네카어 강 주변의 모습은 동화 속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붉은색 지붕들, 고풍스러운 오랜 역사를 품어오며 잘 짜인 조화로운 분위기를 가진 모습에 많은 예술가들이 극찬하고 행복해하며 머물고 싶어 했던 이유를 한눈에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얘깃거리는 유명한 뮤지컬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이다. 본래 빌헬름 마이어 푀르스터의 희곡인데 1901년 초연된 이후 여러 차례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돼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작품으로 황태자 칼 하인리히와 여관 하녀 케티의 `아름답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대부분 하이델베르크에서 촬영되었다. 아직도 <황태자의 첫사랑>은 낭만과 맥주로 넘치는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영상을 가득 채워 젊음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늘 유혹과 함께 향수의 손짓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하이델베르크에 여름이 오면 모든 게 아름다워지네. 향기로운 바람, 보리수나무, 연인들이 길을 잃는 무도회,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지'
하이델베르크의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성령교회 방향으로 골목을 돌아 나오니 하이델베르크의 중심인 비스마르크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는 붉은빛을 띤 헤라클레스 동상이 버티고 서 있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성령교회 앞 쪽에는 우리나라의 포장마차와 같은 휴게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유난히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골목길이 눈에 들어와 알아보니 하우프트 거리라고 하며,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대부분 관광 명소들이 바로 이 골목길에 밀집돼 있다고 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1386년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도 유명한 대학이다. 대학에서 만난 가장 이색적인 곳은 학생 감옥이었다. 옛날 하이델베르크 대학 구내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가벼운 죄를 지은 학생들은 자치기구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처벌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 학생들을 일시적으로 감금해 놓던 장소가 바로 학생 감옥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발한 발상인 것 같았다. 당시에 벽과 천장에 남긴 알록달록한 학생들의 낙서를 보며 감금된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감옥에 수감되면 처음 3일 동안은 물과 빵만 주고 자기반성을 유도했고, 그 이후부터는 사식도 허용되고, 수업도 받을 수 있었지만 감방을 '그랜드 호텔' ‘고통이 없는 곳' 화장실을 ’옥좌‘라고 부른 것만 봐도 학생들이 수감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교수가 학생을 선도하기 위해 감옥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권위를 가졌고. 또 학생이 대학생활의 낭만을 맛보기 위해 한 번쯤 학생 감옥에 가고 싶어 했던 그때 그 시절의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 대학 사회와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술과 사랑에 취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지나 성 입구에 도착하여 고성을 향해 비탈길을 올라갔다. 돌길 언덕을 따라 가을빛을 품은 나무 숲이 무성하고 네카어 강변의 집들이 그림같이 다가온다. 네카어 강 옛 다리 건너 북쪽 산기슭에는 '철학자의 길'이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헤겔, 야스퍼스, 괴테 등 많은 철학자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철학적인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시간이 없어 철학자의 길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월을 넘어 지금도 철학자 누군가가 산책을 하며 사색에 빠져있을 것이라는 상상만 해보았다.
13세기에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이후 각 시대별로 확장 작업이 이뤄짐에 따라 결국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 시대의 양식이 공존하는 성이 되어 있었다. 이 고성에서는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하이델베르크의 술과 사랑을 대표하는 두 가지 상징을 찾을 수 있었다. 고성 지하의 약 22만 리터짜리 대형 술통과 괴테의 애인이었던 낭만주의 여류시인 마리안네 폰 빌레머가 괴테와 함께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하며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자기 사랑의 감정을 읊었다고 하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라'란 시 구절이 고성 뜰 담장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는데 아쉽게도 찾아보지는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성에는 일명 `팔각 탑`이라 불리는 종탑을 비롯해 성문 탑, 화약 탑, 감옥 탑 등과 같은 여러 개 탑과 함께 크고 작은 궁전 몇 개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궁전으로는 루프레히트, 오트하인리히, 프리드리히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가장 오래된 궁전인 루프레히트 궁은 `쌍둥이 천사`에 대한 슬픈 얘기가 전해지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걸작품이라 일컬어지는 ‘오트하인리히 궁’은 건물 정면 각 층 창문과 창문 사이에는 다윗과 삼손을 비롯해 많은 고대 신들을 의미하는 조각품이 세워져 있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궁에는 겨울 왕 프리드리히 5세와 겨울 왕비 엘리자베스의 낭만적인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정략결혼이었지만 서로 첫눈에 반해 왕은 왕비를 위해 '엘리자베스 문'을 하룻밤 사이에 세웠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궁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궁전 지하층에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 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 기네스 북에 등재된 이 술통에는 자그마치 22만 리터의 포도주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전쟁 중에 물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하여 와인을 저장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포도주 통 맞은편 벽에는 궁정의 익살꾼인 난쟁이 페르케오의 상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영주인 칼 필립의 총애를 받던 자로 하루에 18리터의 포도주를 15년 동안이나 마신 애주가였지만, 어느 날 의사가 건강이 안 좋아 보인다면서 술을 끊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다음 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했다.
프리드리히 궁 지하에서 거대한 술통을 이리저리 살펴본 후 밖으로 나와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성벽 내부와 외측을 거쳐 구시가지 방향으로 내려오니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광장이 나왔다. 이곳은 곡물시장이란 뜻의 코온마 악트로 뒤편 산기슭의 붉은 고성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광장 한복판의 분수대에 설치된 마돈 나상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플라다너스는 마치 예술 작품 같은 멋진 모양으로 조경되어 있어 몇 번씩이나 돌아봤다.
코온마 악트 광장에서 우측 골목으로 조금 걸어가니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 무대가 된 소머리 표시와 붉은 외벽의 3층 건물이 나왔다. 그 유명한 명소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선술집 `쉐펠 하우스`였다. 한 세기 전 그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던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황태자와 케티의 사랑이 무르익었던 술집 ‘붉은 황소’에서 골목길 너머까지 그때의 환희와 환호가 들리는 듯하다.
시내를 다 둘러보고 점심은 독일식 햄버거와 우유로 간단하게 먹은 후, 독일에서 맥주를 못 먹고 가면 한이 될 것 같아 생맥주 한잔씩을 마셨다. 독일산 생맥주는 맛이 좀 쓰지만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휴식 후 13시 30분 하이델베르크를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우리가 탄 전용버스는 처음부터 100km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스위스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차창 밖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풍경은 지금까지 거쳐 온 독일의 광활하고 평평한 대지과는 대조적으로 알프스 산맥이 가까워질수록 고속도로 상엔 여러 개의 짧고 긴 터널이 지나치고 주변의 산들은 높아만 갔다. 산자락 끝부분의 높고 낮은 구릉지에 펼쳐지는 초지와 주택들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내내 정숙 운행을 하다 보니 출발한 지 4시간여 만에 스위스의 루째른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린 이 지역에서 가장 크다는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한 후, 인근 한국식당에서 갈비탕에 반주로 소주까지 곁들이니 얼큰한 기분과 함께 하루의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TIVOL CALTON 호텔에 체크인한 후 여장을 풀고 내일을 위해 각자 달콤한 휴식에 들어갔다.
유럽 여행 6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