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름다운 매력에 빠지다
루브르 박물관에선 유리 피라미드만 보다
원래는 퐁네프 다리를 건너 루브르 박물관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200개가 넘는 전시실을 다 둘러보려면 종종걸음으로 다녀도 서너 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특히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상’,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생각해서 외관만 보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에 모두가 찬성했다. 박물관 앞 광장을 지나다가 서쪽 광장 앞에 서 있는 유리 피라미드를 보며 박물관과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강철과 유리 소재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파격적인 건축물을 만든 파리 시민의 예술 안목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박물관을 지나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직 관람해야 할 곳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 기약 없는 약속만 남기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지만 발걸음이 무거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치와 향락으로 점철된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를 스쳐 나와 전용버스를 타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넘어갔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세의 수렵용 별장으로 사용하던 자그마한 성이었지만, 루이 13세의 뒤를 이어 유럽의 맹주로 군림한 태양왕 루이 14세가 대신이었던 포게의 ‘뵈르 비콩트 성’의 화려함을 질투하여 그와 맞먹는 궁을 건립하기로 생각하고 대규모로 증축하여 전체 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사치와 향락의 절정을 이룬 건축물로 그 덕분에 후손들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장소가 되었지만, 정작 루이 14세는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역사가 주는 아이러니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 후 1871년 보불전쟁(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궁전은 처참히 파괴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궁전 내부에 들어가려면 긴 줄을 서야 하지만 현지 가이드가 미리 입장권을 끊어 둔 배려로 빨리 들어갈 수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2층으로 되어있으며, 볼거리는 주로 2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전은 한마디로 아름답다기보다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마리 앙뜨와네뜨 공주가 잠자던 침대는 그 시대 왕궁의 화려함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불과했다.
베르사유 궁전 내부는 일자형으로 되어있어 그냥 앞만 보고 따라가면서 관람하면 되었다. 궁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그랑 다파르트망과 왕비의 침실을 연결하는 홀인 '거울의 방'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발동해서 들어가 보았다. 길이 75m, 높이 13m의 이 방에는 정원 쪽으로 17개의 창문이 나 있고, 반대쪽에는 578장의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직접 재거나 셀 수가 없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천장에는 루이 14세의 업적을 묘사한 천정화가 그려져 있고 41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 촛대가 장식되어 있었다. 궁전 내부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물건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 촛대라고 한다. 이 곳은 루이 15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결혼식을 위한 가면무도회 행사가 열린 곳이기도 하며,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장소 또 한 이 방이었다고 한다. 거울의 방에서 본 베르사유 궁전 뒤쪽에는 광대한 정원과 숲, 화단과 분수, 조각 등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궁전 내부의 화려함에 지친 눈을 달래려고 궁전 정원에 눈을 맡겼다. 과연 지금 역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베르사유에 숨은 비극의 탄생을 생각하며
루이 15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 14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친애 왕’이란 별명처럼 소심하고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그의 사치스러운 궁중 생활과 정치적 무능, 엽색행각으로 결국은 민심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당시에는 페스트나 콜레라,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루이 15세와 그의 아들이 같은 병으로 죽자.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루이 16세가 등장하였으나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민중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신분제 의회 소집 등 그의 무능한 정치와 행정으로 왕정에 대한 불만이 쌓여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은 1789년 7월 14일에 무장을 하고 바스티유 감옥을 점거했다. 이에 당황한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에 서명하였고, 그다음 날 아침에는 베르사유 궁전 주변에 2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였다. 군중들에 의해 베르사유에서 튈러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루이 16세는 그때부터 모든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마리 앙뜨와네뜨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는 계획을 세운 부부는 하녀 복장을 하고 탈출을 감행하였지만, 국경 근처의 마을에서 발각되었고 성난 군중에 의해 파리의 감옥으로 이송되게 된다. 루이 16세는 감옥에서 75일간 독방에 갇혀있다가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리고 10개월 후 마리 앙뜨와네뜨도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처형일 당일 콩세르 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마리 앙투와네트는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인 채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라데팡스의 기하학적 매력에 빠지다
라데팡스는 현대적인 파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신시가지로 건물 곳곳에 예술품들이 있어서 보는 이들의 눈과 가슴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특히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것들이 많은 곳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의 주거 공간 부족과 여러 가지 이유로 미테랑 대통령 때 만들어진 파리의 서쪽에 있는 신도심인 라데팡스는 현대식 건물들로 가득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파리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 파리지앵들의 이주는 거의 없었고, 집값의 하락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는데 맞는 이야기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고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파리에서 메트로로 불과 10분 정도 떨어진 라데팡스는 현대적인 모습의 파리의 색다름을 느껴볼 수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곳이라 한다.
라데팡스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 개선문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파리 중심의 루브르에서 시작되어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을 따라서 보불전쟁 때 파리 방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작은 기념비에 이르는 연장선상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작은 기념비들은 그 주위의 고층빌딩들에 가려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라데팡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신 개선문의 한 변의 길이가 36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인 110m에 달하고 30만 톤 무게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가운데 대형 사각형 공간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그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규모가 정말 놀라웠다. 중앙의 공간에는 강철 와이어와 유리를 이용한 전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정상까지 올라가 볼 수 있으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개선문, 콩코드 광장, 루브르 박물관을 일직선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파리에는 건축물 곳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짧은 일정에 많은 곳을 봐야 하는 우리에게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것은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어 모두 다 그냥 지나쳤다.
점심 식사 시간이 조금 넘어 우리는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이곳의 중국 음식점은 한국과는 조금 다른 맛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아 함부로 주문할 수 없어 짜장면, 짬뽕, 잡채밥을 주문하고, 반주로 고량주 한 병을 시켜 오랜만에 칼칼한 목을 축였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파리의 화려한 문화 유적을 이리저리 관광하다 보니 심신은 피곤했지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샹젤리제 거리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을까?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로 들어섰다. 개선문을 기준으로 12개의 방사형 길 중에, 정면으로 나 있는 가장 곧고 길게 뻗은 도로가 샹젤리제 거리였다. 동쪽의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에서 서쪽 ‘샤를 드골’ 광장의, 에투알 개선문까지였다. '피에르 드라노에'가 이 거리의 이름을 바탕으로 ‘오 샹젤리제(Aux-Champs-Elysees)’란 노래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라고 흥얼거리며 걷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 거리였다. "나는 거리를 어슬렁 거렸네.. 낯선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고서.. 누구라도 좋으니 안녕하고 인사하고 싶었네."라고 시작하는 우리가 익히 들어본 멜로디로 프랑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아닐는지. 사실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워털루 로드(Water Rord)로 런던의 거리를 노래한 것이었으나, 프랑스어 가사를 붙이고 '오 샹젤리제'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샹젤리제’란 이름은 원래 '엘리제의 들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들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복한 영혼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고 믿던 곳이었다고 한다.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르드 광장까지 뻗어 있는 이 대로는 샹젤리제 원형 광장으로부터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콩코르드 광장과 그 너머 튀일리 공원을 향한 아래쪽 부분은 공원이며, 박물관, 극장, 식당 등이 있었다. 개선문을 향한 위쪽 부분은 전통적으로 사치품 상가와 구찌 등 명품 매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또한 30여 개가 넘는 영화관과 오페라 공연장이 있는 샹젤리제 거리는 여러 요소가 만들어낸 특화된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명실상부한 파리 패션의 메카로 관광명소는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리제의 들판이라는 의미의 샹젤리제에는 그랑팔레, 프티 팔레, 엘리제 궁전 등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 자부하는 곳이라고 한다. 신 시가지와는 달리 1800년대 건물들엔 3층과 6층의 발코니는 옆집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유를 들어보면 3층과 6층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층으로 화장실이 층마다 하나밖에 없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이런 생활상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니, 가난은 파리도 별 수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떠올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 보니 동쪽 끝에서 장방형의 거대한 콩코르드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 동쪽으로는 튈르리 공원으로 이어지고 서쪽은 샹젤리제 거리와 이어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마들렌성당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센강에 걸린 콩코르드 교회가 있었다. 광장 중앙의 높이 23m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2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고 한다.
광장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까지 약 2km에 이르는데,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코스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광장에 있는 분수가 바로 2006년에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맨 마지막 신에 나오는 장소였다. 핸드폰을 분수에 던져버리고 미란다 편집장을 외면한 체 유유히 떠나는 주인공 앤디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 감명 깊게 떠올라 적어 넣어 본다. 광장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8개 여신상은 8대 도시를 상징한다고 한다. 브레스트, 루앙, 리옹, 마르세유, 보르도, 낭트, 릴, 스트라스 부트.
콩코르드 광장의 출구이며 샹젤리제 대로의 출발점이기도 한 지점의 양쪽에는 마치 문처럼 '마를 리의 말'이 세워져 멋스러운 풍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뒷발로 서서 날뛰려는 말을 긴장한 마부가 억제하려고 하는 그 난폭한 싸움에서 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저녁 식사는 호텔 인근에 있는 한식집에서 설렁탕으로 먹었다. 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서 집에다 국제전화를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가 너무 반갑고 가슴이 설레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향수 같은 것이었는지 뭉클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휴게실에 모인 우리들은 오랜만에 여행의 여독을 풀 겸 호텔 Clarine 1층에 있는 가라오케에서 술 한잔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라오케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프랑스 젊은이들이 즐겨 부른다는 샹송을 들으며 여행에서 오는 피곤함을 달래 보는 것도 오랜만에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도 파리의 여러 곳을 견학하면서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만큼만 나의 기억 속에 묻은 체 내가 가져가는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럽 여행 4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