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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Dec 05. 2020

여행의 회상(8) /밀라노, 피렌체

르네상스 발상지의 향기를 맡다






# 1996년 10월 29일(화) 이탈리아 밀라노    


밀라노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 5 30분에 기상해서 밖에 나가니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아직 길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새벽 일찍 일하러 가는 듯한 흑인 노동자  명이 지나갔다. 우리가 묵고 있는 QUARK 호텔은 밀라노 변두리 한가한 신도시 지역에 있었다. 어제는 호텔에 도착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아침에 보니 4 건물로  소규모 호텔이었다. 호텔 주변의 도로좁고 돌로 포장한 것으로 보아 수백  전에 건설된  같다. 길가에 가로수는 오래된 거목들이 즐비하게  있어 도시의 연륜을 말해 주는  운치를 더해 주었다. 가을 날씨답게 화창하여 주위를  바퀴 산책하면서 걸어봐도 별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밀라노의 아침은 마치 잠자는 도시 같이 느껴졌다. 새벽이라서 그런진 몰라도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침을 만난 낯선 이방인에게 인사를 하는 것만 같다.  


오늘은 밀라노와 피렌체를 견학하고 로마까지 가야 하는 긴 여정이라 다른 날보다 출발을 일찍 서둘렀다. 우리가 서두르는 바람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 메뉴도 빵과 소시지, 과일 우유 정도였다. 아침 식사가 변변치 못해서인지 여행 중에 먹으려고 빵을 가져가는 여행객도 보인다. 유럽인들의 아침 식사가 딱딱한 빵 몇 조각과 우유 한 잔, 그리고 커피 한잔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곳 호텔의 아침 식사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라노에서는 스포르 체스 코 성과 두오모 성당, 빅토리오 스칼라 극장을 빠른 시간 안에 관광할 예정이다. 밀라노 시내를 조금 걸어가니 스포르 체스 코 성이 건물들 사이로 보였다. 지나가는 길가에는 인도에 까지 테이블을 내어 놓고 사람들이 오밀조밀 마주 보고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스포르 체스 코 성에서 느껴보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숨결

밀라노 시내에 있는 스포르 체스 코 성은 원래 14세기 말 밀라노를 지배하고 있던 비스코티 가문의 궁전이었으나, 15세기 중반 용병 출신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의 권력을 차지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함께 건축물을 완성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스포르 체스 코 성

성으로 가는 길에 서있는 동상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끈 '가리발디'장군의 동상이라고 했다. 스포르 체스 코 성의 정면은 높은 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밖은 깔끔하고 정교한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피에타

성안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기 1 전까지 매만졌다는 '론다 니니 피에타' 진열되어 있었는데 미완성 조각품이었다. 작품을 보는 순간 뭔가 주체할  없는 슬픔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이런 투박한 작품을 만든 것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고   미학적 형식과 법도를 내려놓고 인간의 진실한 삶의 심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어머니 마리아가 시신으로 변한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뒤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통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론다 니니 피에타' 그렇게 세상의 아픔을 품은  박물관에 남아 있었다. 스포르 체스  성을 성급히 보고 나와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할  있는 거리라고 했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에서 '밀라노 칙령'을 읽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에 도착하니, 세계에서  번째로  고딕 건축답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눈을 황홀하게 했다. 성당은 흰색이라 깨끗한 모습  뿐만 아니라 조각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었다. 나폴레옹이 당시 건축 중이던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있을  같았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

성당의 맨 꼭대기에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은 24kg 순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당 사면 벽에 새겨진 조각상이 모두 3.000여 개라고 하니 외면만으로도 이 장엄하고 웅장한 성당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성당 정면에는 문이 다섯 개나 있었고, 중앙의 대문은 이름난 조각가 ‘포리 아기’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호화롭게 새긴 유명한 작품이라고 했다. 좌측 첫 문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신앙 자유를 인정한 문서 ‘밀라노 칙령’을 주제로  한 조각품이 새겨져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벽면에 새겨진 성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수백 개의 작은 촛불 모양 전구들이 켜져 있었다. 실내는 너무나 엄숙했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은 방문객들의 발자국 소리와 수군대는 소리를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시간에 쫓겨 대충 보고 아쉬움을 남기고 나와야 했다.  


세계적인 오페라의 메카, 스칼라 극장 

두오모 성당에서 광장을 지나 건너편에 오페라 하우스 스칼라 극장이 자리해 있었다. 오페라 시즌은 12월 초부터 7월 초까지며 9월에서 11월까지는 콘서트나 발레가 공연된다고 한다. 실내는 3.000석의 좌석이 있으며, 19세기 로시니, 베르니, 푸치니 등 거장의 작품이 초연돼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대가들의 무대공연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입장료가 매우 비쌀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정장을 해야 들어갈 수는 제한이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성악가 조수미가 이 극장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스칼라 극장 안에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일정이 빡빡하여 밖에서 건물 외관만 구경한 후 곧바로 피렌체로 향했다.

오페라 하우스 스칼라 극장

여행 일정에 시간을 맞추느라 뛰어다니다시피 돌다 보니 건물 외관과 그림자만 보고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가야 할 곳은 많고 시간은 빠듯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전 9시 25분 밀라노 관광을 마치고 피렌체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니 넓은 롬바르디아 평야가 펼쳐지며 배추 옥수수가 자라고 밀이 누렇게 익어가는 밀밭이 풍요로워 보였다.

롬바르디아 평원

전용 버스를 타고 계속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다. 이 들판을 배경으로 밀라노가 경제적 중심도시가 된 것 같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밭 사이로 곧게 뻗은 6차선 A1 고속도로를 달린다. 피렌체에서는 이 고속도로를 ‘태양의 도로’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들판에 나무들이 운치 있게  있는 모습이 흡사 한국 농촌에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넓은 들에는 노는 땅들이 많이 .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농촌의 땅은 묵게 되는  같다. 3시간 정도 버스가 평원을 달려오니 구릉성 산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릉에 누런 밀밭들이 펼쳐져 있고 초원에는 소들이 정겹게 풀을 뜯고 있다. 밀라노에서 피렌체까지 고속도로는 곧게 뻗어 있는데 자동차가 그리 많지 않다. 피렌체에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계곡과 계곡을 잇는 웅장한 다리 모습이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연상케 했다. 예술적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다리를   지나니 알프스 험한 산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여러 개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시야가  트이고 넓은 들이 나타났다. 들판을 조금 지나니  도시가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사람들이 책이나 그림, 영화를 통해 추억하고 있는 피렌체라는 것에   없는 작은 동요가 밀려 옴을 느꼈다.


르네상스의 탄생지, 피렌체

밀라노에서 변변치 못한 아침 식사 탓인지 배가 출출하여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을 먼저 찾았다. 식당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맛이 궁금했던 이탈리아식의 수프와 샐러드, 빵과 파스타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가이드가 오후 1시 30분부터 피렌체 시내 관광에 들어간다며 오랜 역사의 도시가 지닌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시간 엄수를 부탁했다. 피렌체는 역사가 깊은 도시라 도로가 좁아 버스를 세울 곳이 없어 세우면 빨리 내리고 탈 때는 빨리 타라고 했다. 또한 여행 중에는 항상 소지품을 주의하라고 하면서, 월남치마를 입고 아이를 안은 채 10여 세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집시들은 훔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신이 준 것을 나누어 갖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니 특히 주의를 당부했다.   

피렌체 도시 풍경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인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지로 14~15C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이 활동한 까닭에 피렌체 시내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예술작품과 건축물들이 남아있어 하나의 박물관을 보는 것 같았다. 또한 가죽 산업이 발달하고 염색업이 발달하여 다양한 색상의 가죽제품으로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페루찌 상품이 유명했다. 우리는 여행 일정도 막바지로 치닫고 해서 피렌체까지 온 김에 페루찌 면세점에 들러 가죽 제품을 나름대로 하나둘씩 구입했다. 페루치의 가죽 상품은 정말 가볍고 조직도 치밀하며 방수는 물론 염색까지 흠잡을 때 없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피렌체 도시 가운데 서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피렌체는 영어로 플로렌스 즉 '꽃의 도시'라는 뜻이며, 피렌체가 꽃이 된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도시를 무대로 문학과 미술, 건축, 조각 등각 분야에서 종전과는 다른 작품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 도시 피렌체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꽃의 도시 한가운데에 마치 도시의 화신(化神)처럼 서 있는 건물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다. 우리말로 바꾸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천국의 문 부조

르네상스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꽃의 성당은 백색과 핑크색, 진한 녹색의 대리석이 잘 조화되어 아름다우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특히 8각 세례 당 동문 외벽에는 ‘천국’ 부조의 10장면이 새겨져 있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 동문을 ‘천국의 문’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단테의 생가에서 신곡을 생각하다

꽃의 성당에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테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은 원래 단테가 살던 집이 아니라 피렌체 시에서 단테가 살던 위치의 건물을 사들여 단테 기념관으로 지은 곳이라고 했다. 단테의 세례명은 두란데(Durante)인데 ‘참고 견디는 자’라는 뜻으로 단테라는 이름도 세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단테는 35세 때 총리에 해당하는 프레 오데에 선출되었지만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며, 신곡도 그때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곡은 저승 세계로의 여행을 주제로 쓴 서사시로 인류 역사상 손에 꼽을 걸작으로 불리지만 정작 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자신도 오래전 단테의 신곡을 읽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곡만큼이나 큰 기대를 하고 찾아온 단테의 생가 벽에는 단테의 조그마한 동상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역시 이곳도 유명 관광지임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앞다투어 사진 찍기 여념이 없었다.   

단테의 생가

로마가 멸망한 후에 많은 지역 중심지는 도시국가로 발전을 했고 도시국가들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피렌체는 바다가 멀리 있기 때문에 무역을 할 수 없어 면방직 공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면방직은 귀족들이 선호했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 귀족들이 옷을 맞추려고 이곳으로 찾아들었다고 한다. 면방직으로 인해 피렌체는 부자 도시가 되었으며, 다른 도시국가의 왕들이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돈을 빌려다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 위해 은행업이 생기고 이 돈을 주고받던 긴 방카(탁자)에서 뱅크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파산하면 책상을 부숴버린다'는 말에서 뱅크 러프트 라 했고 이 말이 파산이란 말이 되었다고도 했다.      


피렌체는 돈의 위력으로 상인들이 모여들어 길드를 조직하게 되었고, 부를 상징하기 위해 화려한 성당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돈이 많으니 자연히 공부도 하게 되고 세련된 생활을 위해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예술가들을 동원해 성당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정원에 많은 조각품을 만들어 진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피렌체 부호들의 지원을 받은 예술가들이 자연히 많은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게 되고, 교회 체제하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적인 것들을 되살려 보자는 문화운동으로 확산되면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되었다.   


피렌체의 상징 피렌체 두오모 성당     

단테의 생가를 둘러보고 난 뒤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두오모 성당은 어느 지역이나 지역 중심 성당으로 대주교가 근무하는 성당이라고 한다. 우리가 두오모 성당이라 부르는 두오모(Duomo)의 뜻은 영어의 돔(Dome)과 같은 의미로,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뜻은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 성당이기 때문에 꽃처럼 아름답고 외관이 웅장하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성당은 피렌체 중심가에 있는 르네상스식의 거대한 둥근  건물로, 175년에 걸쳐 ‘가능한 장엄하게 더욱더 화려하게라는 목표로 세워진 성당이라고 한다. 피렌체 어느 곳에서도 100M 높이의 둥근 돔이 보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이었다. 모자이크식 벽체는 장관을 이루며 내부는 전성기 고딕 아치형 천정으로 받혀져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관람할 수는 없었다. 부속 미술관에는 도나텔로의  달라 마리아  예술품이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르네상스의 꽃이라는 두오모 성당  8 정문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어가며 20년에 걸쳐 만든 문이라고 하며, 문안에 있는 교회는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이라고 한다. 건물 하나, 하나가 바로 피렌체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피렌체 중심가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했다.          


 '산타크로체 성당'인가 '성 십자가 성당'인가

피렌체 중심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산타 크로체’는 ‘성스러운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성당 또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인 ‘타우 십자가’의 T자 형태로 건축되어 '성 십자가 성당'으로 불렀다.

성 십자가 성당과 단테의 동상

성당으로 들어가는 오른쪽엔 단테의 동상이 서 있었다. 예배당은 많은 묘석들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벽을 따라서 호화로운 무덤들이 즐비했다. 이곳에는 모두가 르네상스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로씨니, 갈릴레이, 기베르티 등이 이곳에 묻혀있다고 한다. 나는 시간의 벽을 넘어 르네상스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만 같았다. 단테의 무덤은 기념 무덤으로 그의 본 무덤은 라벤나에 있다고 한다.


베키오 궁전에서 박물관의 향기를     

베키오 궁전은 관광객들의 휴식 장소이기도 한 시뇨리아 광장 옆에 있었다. 베키오 궁전 거리에 들어가 보니 궁전 기둥에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 유명한 인물들 조각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베키오 궁전은 높이 94m의 종탑이 우뚝 솟은 고딕 양식의 건물로 원래는 로마 제국시대의 요새였다. 특히 14세기를 거치면서 주변 도시인 시에나가 밀라노와 손잡고 끊임없이 침공해오는 외세에 맞서기 위해 요새 기능을 강화하게 되었고, 벽에는 총을 쏘기 위한 구멍과 감시탑을 만들었다. 지금은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곳은 단순히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라 건물 내부의 예술품들을 보면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베키오 궁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베키오 궁전 앞에서   있는  하나의 명작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르네상스 조각품의 걸작이며 피에타상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다비드상은 시뇨 리오 광장에 있는 베키오 궁전의 입구 정면에 우뚝 서있었다. 지금 다비드상은 파손을 막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피렌체의 미술관으로 옮겨 놓았으며, 시뇨 리오 광장에 있는 다비드 상은 복제품이라고 .  

 

베키오 궁을 나오니 눈앞에 아르노 강가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졌다. 아르노 강 위에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아름다운 몬테 베키오 다리가 보였다. 이 다리를 처음 봤을 때 다리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건축물이 의아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알고 보니 다리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고 그 가운데로 사람이 지나다니는 구조였다. 정말 독특한 다리의 모습과 형태가 강의 풍경과 어울려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풍광을 그림처럼 펼쳐내고 있었다.    

아르노 강과 베키오 다리

피렌체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귀공자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삼나무와 운치 있는 소나무,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피렌체 언덕 오르는 길

언덕에 오르니 시내 한복판에 두오모 성당이 우뚝 솟아 있어 시내를 품에 안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현장에 왔을 때는 우리 스스로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있는듯한 착각 속에 있어야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 언덕에서 바라보는 두오모 성당과 베키오 다리에 숨어있는 단테의 고뇌와 사랑을 함께 느끼며 밀라노와 피렌체의 관광을 모두 마치고 저녁 8시까지 로마에 도착하기 위해 모두 버스에 올랐다.

 

로마로 가는 길

우리는 밀라노와 피렌체에서의 모든 관광을 마치고 오후 4시 피렌체를 출발하여 로마로 향했다.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영혼의 도시 로마로 가는 데는 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270만이 사는 로마에 1년에 5,0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로마에서의 관광이 벌써부터 기대와 설렘으로 밀려왔다. 달리는 차 안에서 가이드가 이탈리아어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 이탈리아어 연습

- 하나, 둘, 셋 / 우노, 두에, 뜨레,

- 물 / 아주 아, 물 1병 / 우 노아 주아

- 감사합니다 / 그렇지, 아침 인사-굿모닝 / 본조르노  

- 저녁 인사 / 보나 놋데, 점심때 인사 / 보나세라, 안녕하세요 / 사오    


무솔리니 때 만들었다는 A1 고속도로를 버스는 달리고 있다. 농촌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과 비슷했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올리브 과수원이 이어져 있다. 올리브 단지를 지나니 포도밭이 나타났다. 이탈리아 2대 과일이 올리브와 포도라고 한다. 와인 생산은 끼안띠가 유명한데 이탈리아인들은 레드와인과 토마토를 즐겨 먹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고 즐기며 살고 있기 때문에 평균 수명이 85세라고 한다.


밀밭도 보이고 포도밭도 보이고 허름한 농가들이 한국 농촌과 흡사했다. 구릉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밭에다 집을 짓고 주위에 나무를 심어 거목들이 운치 있게 가옥들을 감싸고 있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와 뭉게구름, 황금 밀밭과 푸른 채소밭과 과수원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한 폭의 풍경화와 같았다. 버스는 구릉과 평야 사이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구릉에는 포도 복숭아 올리브 농장이고 평야는 온통 밀밭뿐이었다.

오르비에토 성곽도시

로마를 향해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위에 큼지막한 건물이 보였다. 오르비에토라는 성곽도시라고 하는데 옛날에 외적을 막기 위해 건설된 도시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앞에 펼쳐진 오르비에토의 모습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속에 등장한 ‘하늘을 나는 섬나라 연상케 했다. 바위산 위에 갈색의 고성으로 둘러 싸인 도시 오르비에토는 고대 에트루리아의 12 도시  하나로 후에 로마의 도시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 와인 ‘오르비에토 생산지라고 한다. 일정이 바쁘다 보니 버스 안에서 가이드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 직접 보지 못하고 껍질만 보고 다니는 것이 아쉬웠다.

 

로마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었다. 저녁 식사 마치고 9시에 DUCAD’ESTE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B급 정도 되는 3층 자리 호텔이다. 일행의 숙소 배정을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10시가 넘었다. 샤워를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유럽 여행 8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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