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지금도 휴일인가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은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 소매치기와 도둑이 좀 많지만 과거의 화려한 전통과 유물만을 고집하지 않고 현대의 첨단 패션과 유행을 잘 융합시키고 있는 로마는 이탈리아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도시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은 1955년에 개봉된 영화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로맨스 코미디의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로마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흑백의 감성을 느끼수 있으니까 말이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 후 맨 처음 방문지로 바티칸 시국으로 향했다.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 내에 있지만 이탈리아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립적인 국가이다. 현재 교황의 집무실이 있고, 주일마다 미사도 드리는 곳으로 들어갈 때는 여권이 있어야 하는 곳이고, 이탈리아의 역사적인 유적과 문화재가 많은 곳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로마 북서부 테베르 강 오른편에 위치한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미술관, 성 베드로 성당 등이 있다. 로마 시내로 접어드니 바티칸이구나 싶은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곳은 전 세계 가톨릭의 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관광객들이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대부분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일 정도로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 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관광지다. 바티칸 박물관은 영국의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걸작들은 최고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티칸 박물관이 처음 일반에 공개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역대 교황의 궁전으로 사용되던 바티칸 궁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공개한 것이다. 소장된 유물만도 며칠 동안 봐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할 예정이라면 시간적 여유를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사실 바티칸 박물관은 하루 종일 다녀도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고 하는 데 짧은 시간에 둘러보려니 아쉬움이 남았다. 박물관은 하루 방문객이 3만 명을 넘기 때문에 유물 앞에서 가이드가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입장이라 들어가기 전 박물관 입구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오전 09시에 입장을 시작하여 오후 2시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말엔 오전에 끝난다고 하니 평일이라 다행이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그 규모가 모르긴 몰라도 대영박물관보다 더 넓을 듯싶다. 대영박물관은 그래도 벽면과 전시실만 보면 되는데 이곳에서는 천정에 새겨져 있는 벽화까지 보아야 하니 시간이 배로 걸린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석고상 및 조각상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가지 수상한 것은 몇천 년은 되었을 조각들이 금방 만든 것처럼 너무 깨끗했다. 보존상태가 좋은 건지 모조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조각품들만 계속 보니 이러다 끝도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목적한 그림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만 보고 가기로 했다. 이 두 그림은 박물관 내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져 있는 세계 최대의 벽화로 그림이 너무 디테일하고 사실적이어서 모두 조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천지창조' 천정화의 구성은 1. 어둠과 빛을 구별하다. 2. 해와 달을 창조하다. 3. 바다와 육지를 분리하다. 4. 아담을 창조하다 5. 이브를 창조하다. 6.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다. 7. 노아의 제사 8. 홍수와 노아의 방주 9. 술 취한 노아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장면 등 총 9컷이며, 양쪽 아래에는 12명의 예언자와 그리스도의 조상,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처음 생각할 때는 조그만 방 천장 정도에 그려져 있는 소박한 그림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거의 체육관 정도의 천정에 그림이 꽉 차 있었다. 높이도 거의 삼사십 미터가 넘고 이걸 미켈란젤로 혼자서 그렸다고 생각하니 미켈란젤로의 노력에 대해서 감동을 넘어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그림이었다. 그림이 너무 디테일하고 사실적이어서 모두 조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말 이 그림만으로도 바티칸 박물관은 충분히 관광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후의 심판'은 60대의 노장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대성당의 제단 뒤 전체의 벽에 7년 동안의 긴 세월에 걸쳐 그린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이 세기의 걸작은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류의 종말을 상상시키는 ‘최후의 심판’은 20년 전에 그런 낙관적인 천장화의 ‘천지 창조’와는 전혀 다른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상과 미켈란젤로의 비관적인 인생관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교만한 인간들의 신앙으로의 경건하고 겸손한 복귀를 외치는 미켈란젤로 최후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전 나체로 그렸으나 거듭된 종교회의의 결과 미켈란젤로가 죽기 1년 전 덧칠로서 옷을 입히기로 결정하여 그의 제자에 의해 다시 꾸며졌다고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나오자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홀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만난 '피에타'
성 베드로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럽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성당 이상의 성당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처음 바실리카 식의 성당을 세웠으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에 의해 120년 동안 당대 최고의 거장인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에 의해 여러 번 설계가 변경되면서 현재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된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을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이고 광장과 함께 열쇠 모양으로 나타나며, 이 열쇠 모양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천국의 열쇠를 의미함과 동시에 가톨릭의 교권을 상징한다고 했다.
성 베드로 성당 관광은 긴 바지와 티셔츠 또는 정장으로 차려입어야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교황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데 형식상의 절차란 느낌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 내부는 우선 돌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로 에어컨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했다. 거의 동굴에서나 가질 수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규모로는 여태까지 보아왔던 유럽의 성당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부에는 정말 부의 극치라고 할 만큼 구석구석 정성 들여 꾸며놓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베드로를 안고 있는 성모상'은 저절로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조각 작품이었다. '쿠폴라'라고 하는 베드로 성당의 중앙 돔 부분은 미켈란젤로가 설계를 하였는데, 이 돔이 갖고 있는 의미는 당시의 건축학적으로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쿠폴라로 인해 이후 만들어지는 유럽 다른 나라 성당의 돔의 기본 틀이 되었다고 한다.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성당 안의 오른쪽에 있는 '피에타'였다.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완성한 작품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이 드리워진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대리석에 새겨진 생생하고 섬세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부드럽고 은은하게 빛나
고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젊었던 시절에 조각한 작품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25살의 청년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미켈란젤로는 작품 안에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작품임을 표시하는 자기 이름을 서명해 놓았지만, 후일에 미켈란젤로는 자기 작품에 흠집까지 내면서 서명한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고 한다. 바티칸 박물관과 대성당에서 웅장한 문화유산을 감상한 후 우리는 전용버스를 타고 콜로세움을 향해 출발했다.
콜로세움에서 로마인의 함성을 듣다
로마의 그 유명한 상징인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거대하다'는 뜻으로 근처에 거대한 네로 상이 있어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고대 로마 유적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타원형 건물로 최대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 하지만 아직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데서 로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감탄할 뿐이다.
콜로세움 안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전투 경기는 오늘날의 프로스포츠와 같아서 당시 로마 시민들은 이 경기를 보며 매우 열광하였으며, 황제들도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검투 시합을 자주 열고 경기에 참관하였다고 한다. 관중석은 신분에 따라 정해졌는데, 1층은 황제와 귀족, 여사제, 2층은 무사, 3층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 그리고 맨 위층은 일반인과 여자들의 자리였다고 한다. 놀랄만한 사실은 이 거대한 원형경기장에 햇빛이 강하거나 비가 올 때,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천막 지붕을 덮었다는 점이다. 콜로세움은 완전한 타원형의 모습이었는데, 지진에 의해 무너지고 떨어진 곳을 후에 교회를 짓는 데 사용하면서 반쪽이 사라졌다고 한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진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아직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규모만으로도 관광객을 압도하였다. 콜로세움을 돌아보며 그 당시 검투사의 모습과 관중들의 함성을 상상하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을 지나 황궁터가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 올랐다.
팔라티노 언덕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곳으로 로마가 시작된 곳이었다. 경사가 완만하고 산 정상이 평평해서 일찍부터 거주지로 사용되었는데 로마 제정 시대로 들어오면서 황제들은 로마의 창시자인 로물루스의 정통성을 이어받고자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서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거주지를 따라 옮기면서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의 부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팔라티노 언덕 뒤편의 탁 트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대전차 경기장과 포로 로마노는 여행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팔라티노 언덕을 걸으며 그 시대의 영화로웠던 모습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좌측으로 걸어 나가니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진실의 입' 이 있었다. 산타마리아인 코스메딘 성당 입구 한쪽 면에 진실을 심 파하는 입을 가진 모양의 원형 석판으로 해신인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거짓말쟁이가 트리톤의 입에 손을 넣으면 트리톤의 입이 다물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니 많은 관광객이 입속에 손을 넣어보고 간다. 우리도 덩달아 한 번씩 손을 넣어보며 멋접게 웃으며 포로 로마노로 향했다. 오늘 저녁 비행기로 우리나라로 출발해야 하는 일정 탓으로 지체할 시간이 없어 겉만 보고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대 문명의 폐허 같은 포로 로마노 유적지
포로 로마노는 거리 전체가 유적인 구역으로 약 1,000년 동안 고대 로마 시대의 중심지이자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포로(Foro)"란 공공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광장을 뜻하는 영어의 포룸(Forum)의 이탈리아 말로서 신전, 공회당, 기념비 등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광장이며 도시민의 공공생활을 수용하던 공간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듯이 1,200년을 이어 온 제정 로마 시대의 역대 황제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이곳에다 원로원 재판소, 개선문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있었던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과 함께 황폐화되고 르네상스기에는 개인의 별장, 성당, 요새 등을 짓기 위해 이곳의 건물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는 바람에 채석장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처참하게 버려진 모습이 애처롭지만 건다 보니 전성기 로마제국의 위세와 번영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건물들을 치장하고 있는 조각상들도 무수히 널려 있으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석상들 중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놓여 있는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의미는 대단하며, 지금도 웅대하고 불가사의한 저 유적들이 고대인이 봤을 때의 광경은 얼마나 장대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포로 로마노는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치의 중심인 원로원 건물이나 막센티우스 황제의 신전,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등 웅대한 자태로 남아 있는 건조물들은 콜로세움과 함께 한번 여행한 사람은 꼭 기억에 남아있을 장소라고 생각되었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을 남긴 로마제국은 유럽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도 그 지역의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흡수하고 통합하여 가장 합리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다스림으로써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이제는 지나간 시간 속에 잠든 위대한 흔적만 바라 볼뿐이었다.
포로 로마노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란 시간 속에 존재했다가 묻히고 또 다시금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겹겹이 쌓인 유물들은 어느 시기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질 것이다. 로마 문화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순간 땅 밑으로 가라앉았던 폼페이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이 포로 로마노에서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로마는 그 전체가 역사적인 도시지만, 특히 이 지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여기에선 돌멩이 하나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가는 곳마다 보게 되는 유물에 압도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질투심 같은 기분도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캄피돌리오 언덕
포로 로마노를 둘러본 뒤 계단을 올라가면 캄피돌리오 광장과 연결된다. 캄피톨리오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이다. 이 언덕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16세기 미켈란젤로의 디장인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 지금에 모습에 이르고 있으며, 미켈란젤로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바로크 양식의 캄피돌리오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캄피톨리오 광장으로 오르기 위한 '코르 도니타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착시효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보통 게단을 오르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윗부분이 좁아지는 사다리꼴로 보이는 데 이곳은 그다지 좁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위로 갈수록 계단의 폭을 넓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덕을 올라가는 계단은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했다. 이것은 과거 이곳이 정치의 중심지였고 그러다 보니 많은 외국 사절들이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바티칸이 아니라 이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왔으며, 따라서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경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에 양 옆에는 제우스와 인간 레다 사이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로 레길루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승리로 이끈 전설의 인물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석상이 있었다.
베네치아 광장 주변 통일기념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상이 있는 남쪽에는 거대한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서 있다. 이 건물은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이었던 에마누엘레 2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내부는 통일 기념 박물관이다. 광장 앞의 에마느엘레 2세 거리 주변은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로마의 중심이었던 구역으로 주변에는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귀족의 궁전도 많이 있었다. 통일 기념관을 지나 판테온으로 향했다.
판테온 신전은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유적
판테온 이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의 신전"이란 뜻으로 아그리파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해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서기 80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서기 125년 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완성된 2세기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드문 건축물로 당시의 높은 건축 수준을 알 수 있다. 16개의 원기둥이 있는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 지름과 천장의 높이(43.3m)가 같은 넓은 공간이 나온다. 커다란 원형 천장은 성스러운 신에 대한 경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거대한 건축물 아래 서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불가사의함 마저 느끼게 한다. 나중에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San Pietro) 대성당을 지을 때, 당시 교황은 '아그리파의 판테온보다 더 큰 돔'을 짓고 싶었으나, 당시 건축가들이 '도저히 자신들의 기술로는 그보다 더 큰 돔을 만들 수가 없다'라고 할 정도의 공학적인 금자탑이라고 한다.
판테온은 로마인들의 위대한 공학 능력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거대한 돔을 아치 구조를 이용하여 쌓아 올려놓았으며, 경이로운 사실은 건물 안에 기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반원형 지름과 아치의 원리를 이용하여 오직 벽만으로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돔 천장 한복판에는 지름 9m의 창이 뚫려 있는데, 이것을 '눈'의 의미를 가진 '오쿨루스'라고 했다.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채광만으로도 조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외부보다는 내부를 더 중요시한 고대의 몇몇 거대 건축물 중 최초의 예가 아닌가 한다.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알록달록한 대리석으로 입혀져 있었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돔과 주요 구조물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상당히 많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외관을 장식하였다고 한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 일어난 외부세력에 의한 수차례의 약탈 과정에서 중요한 금속장 속물들이 약탈당했으며, 17세 초에는 신전 천정을 장식하던 청동 천장을 벗겨내어 교황청을 방어하기 위한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했으며, 일부는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의 중앙 제대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판테온은 로마의 주요 인물들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되었는데 화가인 라파엘로와 카라치, 작곡가 코렐리, 건축가 페루치, 또한 근대에는 이탈리아를 통일한 에마누엘레 2세와 움베르토 1세 등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판테온에서 서둘러 나와 로마에서의 마지막 관광지인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 트래비 분수
트레비 분수는 팔라초 폴리 건물 한쪽 면을 조각 군들로 장식하고 있는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로마에는 크고 작은 분수대가 많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상수도 시설을 보수하고 추가로 건설하여 물 공급이 원활해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분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넵튠)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반인 반어의 해신 트리톤이 해마를 길들이고, 다른 한 트리톤은 동물을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바로크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이 살아 있어 로마의 분수 중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에는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온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수 앞에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몰려 있어서 복잡하기도 했지만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다. 분수 주위에는 거의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뒤로하여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트래비 분수는 뒤로 하여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로 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기에 나도 한번 뒤로 동전을 던져 보았다. 동전을 여러 개 던졌더니 뒤에 반짝이는 동전이 하나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예전 로마 제국에서는 전쟁터로 간 애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이곳에 동전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어져 지금은 로마 여행 중 꼭 거쳐 가야 하는 동전 던지기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하나 던져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두 개가 들어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고, 세 개가 들어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었으며, 던져진 동전은 각종 국제 빈민 구호 단체 등에 보내는 기부금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유럽 5개국, 10박 11일간의 마지막 관광지인 로마를 끝으로 연수단 일동은 아픈 사람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 로마에서 피자와 파스타 등으로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로마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저녁 9시, KE916편으로 로마 공항을 출발하여 서울 김포공항을 향한 긴 시간의 비행을 생각하면서. 그동안의 여행에 지쳤는지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난 얼마 후 저녁 9시가 조금 넘어 KE916편 비행기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한국을 향해 날아올랐다.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꿈같은 여행 유럽을 생각하면서. 낯선 도시로 여행하는 소감은 개인마다 다양하겠지만 나는 책에서만 보고 상상만 했던 역사 속의 도시를 걷기도 하고 직접 보고 느끼면서, 그 당시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손길이 닿았던 건축물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행복과 슬픔,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비행기의 이륙과 함께 런던, 파리, 프랑크프루트, 하이델베르크, 루째른,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폼페이, 쏘렌토, 로마 등 역사의 흔적을 가득 품은 아름다운 도시들의 건축물과 박물관, 강과 공원 등 인류 문명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체 나는 또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