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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선생 Jun 24. 2016

오늘의 문학 읽기, 문학 일기(2)

첫번째 단편- 김이설의 '아름다운 것들'

 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 중 '아름다운 것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데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있나
비야 네가 알고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데로 가야할까
https://youtu.be/hFiqpnlpK_8 (양희은, 아름다운 것들)


1. 그녀는 지금 절망적이다.


그녀의 절망은 자신의 생을 끊어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절망은 슬픔이라기 보다 저주에 가깝다. 그 저주가 향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 세계의 삶. 그녀가 끊어내려는 것은 삶, 희망, 미래, 어쩌면 세계, 이 세계. 그녀는 지금 베개를 들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어디서부터였나. 이 고통스러운 삶은. 나의 아이들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긴할까? 내가 없는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아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생활은...


2. 이야기는 이렇다.


 그녀의 남편은 해직되었다. 아마 그는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으니까. 청천벽력. 그에게 닥친 일은 그러니까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사회에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의 일이 되고, 내 가족의 일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녀는 해고라는 재난 앞에서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에겐 가족이 있지 않나. 두 아이와 그 아이들의 할머니와 해고 이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남편과 반도체 사업장에 나가게 된 그녀. 그러나 이 자본의 사회와 기업가들의 나라에서 최하층으로 내쫓긴 가족이 살아남을 방도가 몇 가지나 될까?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법원은 파업으로 인해 기업이 입은 손실을 파업 노동자들에게 보상할 것을 명령한다. 터무니없는 금액은 가족 경제를 붕괴시킨다. 남편은 간신히 이어가던 생의 끈을 놓는다. 할머니(시어머니)는 인식의 끈을 놓는다.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갈 것이다. 아이들만이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의 노래는 밝고 아름답다. 그 계이름이 입에서 계속 맴돈다.


미미 레 도미솔 라 라솔 미레 도 도도 미솔미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보다 아름다운 것을 난 알지 못한다. 아마 그녀도 그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 아름다운 것들을 누가 어디로 데려갈까 생각한다. 베개를 든다. 이제 막 재롱잔치를 끝내고 엄마와 신나는 외식을 마치고 돌아와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며 엄마는 베개를 든다. 고통의 신음 대신 엄마가 내뱉은 것은 아이가 재롱잔치에서 보여주기로 한 실로폰 연주의 계이름.. 미미 레 도미솔 라 라솔 미레 도 도도 미솔미레..... 엄마는 머리를 바닥에 찧는다. 무엇을 더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잠에서 깬 큰 아이가 또르르 오줌을 싸고 엄마 옆에 눕는다. 엄마는 자장가를 부른다. 영원히 잠들 자장가.  미미레 도미솔 라 라솔 미레 도 도도 미솔미레.....


새벽이 밝아온다. 이제 그녀의 차례다.


3. 그녀는 말한다


팔십여일 간의 파업끝에 남편은 구속되었다. 남편 때문에 파업을 한 것도 아니고남편 때문에 회사가 그 지경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벌을 받은 건 남편이었다. 차라리 잡혀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었다면 남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피해에 보상을 하라고 소송을 걸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육십 채쯤 팔면 가능한 금액이었다.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278)  
물론 남편의 안전을 걱정했다. 경찰과 대치하면서 부상자들이 나왔고, 노조원이 점거한 회사 건물은 고립되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사정에 화가 나고 납득이 되지 않았ㄷ. 그럴수록 남편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다는 남편의 의지가 내게는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280)
남편의 자살이 용납되지 않았다. 남편의 이기심은 치졸했다. 어떻게 자기 혼자 살겠다고 자기만 죽을 수 있는가. 어떤 언질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다니, 독하고도 모진 사람이었다......(중략) ... 나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더이상 원망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고마웠다. 아프다고, 고쳐보겠다고, 정말 살겠다고 했다면 내가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눈물이 났다. 남편의 결심이 갸륵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대로 울 수 있었다.(286,288)
어머니라도 멀쩡했으면 이렇게 멀리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 탓이라는 건 아니다. 어머니라고 바라서 그 지경이 된 건 아니니까. 내 몸이 멀쩡했어도 여기까지 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머리로는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마음이, 가슴이, 그보다도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294)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가 되는 게 옳은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294)


4.나는 그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세월호가 단원고의 아이들을 가두고 저 시퍼런 바다 밑으로 사라져버린 그 날 이후. 나는 소설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재난이라고 부르든 재앙이라고 부르든, 사고라고 부르든 사건이라고 부르든, 나는 아이들의 눈을 한동안 마주볼 수 없었다. 이것이 너무나도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것, . 마땅히 있어야 할 이름을 지우개로 지우고 그 자리에 다른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 상징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다른 이름으로 대치할 수 없었다. 세월호는 우리의 미래와 혹은 희망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서 지워버렸다. 그것이 나만의 고통은 아닐 것이며, 나만의 어려움 또한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확인해도 아픔이나 고통이 줄어들지 않았다. 단원고의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나눠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시간이 흘러도 더 생생해지기만 할 뿐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운 건 아닐까.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아이들을, 미래를 물 속에 수장시켜놓고도 태연한 국가. 애도의 방법을 잊은 것인지 애초에 이런 일에 무슨 애도냐는 마음인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어떤 사람달. 그리고 그들이 부모들을 향해 말로 던지는 칼날들. 그 말들 속에 우리의 아이들이 한번 더 숨을 멈추지나 않았을까.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돈'으로 세상을 비춰보는 사람들. 그 속에서 읽은 저열한 이 사회의 이면은 이 나라가 어째서 저출산 국가인지를 왜 그렇게 되어 왔는지를 보여줬다.



쌍용차가 정규직을 해고했을 때 이른바 우리 사회에 헬게이트가 열렸음을 직감했다. 해고는 권고 사직의 형태였고 해고된 사람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비로소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고용이 주는 '돈'이 아니라 동료와 함께하는 연대였고, '일'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엄혹한 시간.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과 응원하던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노조는 '이익'을 쫓는 자들이라는 명패가 붙고, '이익'을 위해 동료들의 일터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국가가 개입했다. 그들에게 손해배상 명령이 떨어지고, 삶의 근간이 흔들렸다. 비로소 우리는 '해고가 살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살인'이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존재의 축출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낙인찍히고 왜 이런 대우를 받느냐? 사회에서 받아 주지 않고 억울하니까 죽는거에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 해고가 되었다 치더라도 죽지 않고 살 수는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하잖아요. -정혜윤, <그의 슬픔과 기쁨> 중에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011832231&code=940100


28명의 죽음. 자살. 이 나라의 삶은 어쩌면 이토록 연약한 것인가? 이 28명의 죽음 앞에서 '공공'은 침묵하거나, 응시했다. 삶의 기반이 통째로 흔들렸건만, 우리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공공'은 자리를 비웠다.


흥겹게 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죽고, 해고된 어른들이 자살하는 나라.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압도적이다. 아이들이 모두 죽고 엄마가 말하는 이 장면의 비극성은 '밝아오는 날'에 '죽음'을 기다리는 엄마의 마지막 독백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이 고통스러운 장면이 그나마 이 소설에서 가장 안도하게 만드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마지막을 우리는 예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나즈막히 '나'를 향한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 있는 아이들 옆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두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이제 내 차례였다.


5. 나는 이런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지지한다.


아이들이 죽거나 학대 당하는 장면은 상업성의 끝판왕인 헐리웃에서도 일종의 금기다. 문학은 이런 금기와 싸우는 장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은 불편하다. '아이'의 자리에 '미래'를 집어넣을 수는 있겠으나, 극단적인 방식의 이같은 전개는 난감함을 넘어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이것은 체험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계속 몰입하게 만들고 그 몰입을 통해 나와 당신이 이 불편한 세계에 침투하도록 만드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나'가 '그녀'에 잠시 이입되고 내 존재를 '그녀'에게 잠시 맡겨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녀'의 상황에 개입할 수 밖에 없다. 관망하던 현실에서 체험하는 현실로 전환이 벌어진다. 이 비극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칭얼대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부르고,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할 때,


우리도 같이 즐겁다. 우리는 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소설은 시작부터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순간 떠오르는 삶의 국면과 되돌리지 못하는 조건들.


아이들이 칭얼대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부르고,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할 대,


우리는 두렵다. 그 끝없는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노래부르다가 문득 그 어둠의 심연을 느끼고 머리를 찧을 수 밖에 없다. 그녀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응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게 만들고,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시킨다. 이 소설 어디에도 낭만은, 희망은, 기쁨은 없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어딘가의 진짜 이야기다.  



6.


이 소설집에 실린 나머지 이야기들 모두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혹은 가족이 사라지는 이야기. 그리고 가족에 의해 목숨을 강탈당하는 이야기가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물끄러미바라보다가 슬픔이 차올랐다. 아이들의 숨소리가 고르고 예뻤다.. 무슨 꿈을 꿀까? 성급히 다가오는 아침은 인사도 없이 꿈을 흩어 놓을것이다.  그래도 행복한 꿈이길...슬픔을 흩어냈다. 잠시 뒤척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평화가 느껴졌다. 나의 평화가 '그녀'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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