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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 독자 Apr 29. 2024

자유를 찾아서

4월 3일 일요일,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저 한국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던 사람이에요. 주 6일을요. 이 여행을 오기 위해서죠. 이건 제 꿈이었거든요. 열심히 일 했어요. 돈 벌려고요. 돈이 있어야 여행을 하니까요."


  이 절박한 문장은 여행 중 내가 택시를 탈 때마다 주문처럼 외던 스몰토크의 대표 문장이다. 물론 한국어가 서툰 남미의 기사님들을 위해 스페인어로 준비해 갔다. 홀로 공부한 스페인어는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끝내 초급반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문장의 과거형을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매번 현재형으로 말했지만 그들은 늘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게 된 이유에는 여행 중 만난 여행자들의 무서운 경험담이 한몫했다.


  “리마에서 택시를 탔는데 타다 마자 목에 칼을 겨누는 거야. 죽는구나 싶었어. 가진 것 다 내놓고 내리라기에 몽땅 다 두고 내렸지. 너무 허탈해서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가야겠다 했는데 여권까지 가방 안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어휴 난 말이야, 택시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말도 없이 다른 이를 태우더라고? 합석이 자유로운가 싶었는데 둘은 택시 사기단이었어. 그 길로 돈을 다 뺏겼다고."


  이처럼 택시에서 강도나 사기를 당하는 봉변은 심심찮게 들렸다. 오롯이 혼자 하는 여행이었기에 내 몸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 되었고 <조심, 또 조심>을 여행의 제1원칙으로 삼아야 했다. 그렇다고 남미의 모든 택시 기사님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경계할 수는 없는 터. 버스나 지하철이 여의치 않은 곳에서 택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고민 끝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 택시를 탈 때마다 일단 기사님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늘 먼저 “Hola~ Como estas?” 라며 스몰토크를 이어갔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는 잠깐이나마 친구인 양 살갑게 굴었다. 제발 택시를 타서 생기는 변고는 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그때마다 이 대표 문장이 나를 고국에서 불쌍하게 일만 하다 겨우 겨우 여기까지 여행 온 가난한 여행자로 둔갑시켜 주었다. 이는 “제발 불쌍한 노동자인 나에게 사기 치지 말아 주세요”하는 간청과도 같았다. 그렇다고 이게 아예 지어낸 말은 아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하루 12시간은 아니었지만 11시간씩은 일했다. 물론 사회 초년생이었던 2~3년간은 실제로 12시간씩 일했으니 하루의 절반을 일했다는 나의 말이 완전 거짓도 아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일만 많이 하다가 드디어 ‘꿈의 여행’을 하게 된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의 티티카카 호수’를 찾아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에 갔을 때의 일이다. 티티카카 호수는 사춘기 시절 본 영화에서 처음 알게 된 곳인데 그때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티티카카 호수에 인접한 코파카바나는 작은 도시였기에 이동 수단으로는 택시가 필수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안전하게 이동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택시에 올랐다.


  늘 그랬듯이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며 즐거운 스몰토크를 하던 중이었다. 기사님은 나의 아버지 또래 정도셨는데 남미의 여느 기사님들처럼 여유롭고 유쾌한 분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티티카카 호수를 보는 것은 나의 꿈”이었다고 전하며, “이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서의 나는 매일매일 일을 정말 많이 했다”는 나의 대표 문장을 잊지 않고 뱉은 참이었다.


  내 말을 들은 기사님의 표정이 불현듯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는데 그가 말을 꺼냈다.


  "단. 인생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인생에서 중요한 것? 그게 아니라니? 뭐가 아니란 거지?' 어안이 벙벙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게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밥을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일을 하고 싶을 때 일을 하는 게 바로 자유야. 사람에게는 이런 자유가 필요해. 이건 돈보다 중요한 것이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단순히 택시 사기를 피하기 위해 내뱉었던 절절한 나의 노동 이야기가 스스로 더없이 가여워졌다. 사기당하기 싫어서 불쌍하게 포장한 나의 대표 문장은 포장이 아닌 진짜였기에. 그리고 그런 내게 진심 어린 이야기를 해 준 그의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예상하지 못한 택시 기사님과의 스몰토크에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주제로 꽤 심도 있는 대화를 이어가며 사기당하기 싫어 쥐어짜 내어 만든 가짜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가 말한 “나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라는 문장은 여행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이 떠오를 때면 나는 지금의 내 삶과 그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곤 한다. 그가 해준 마지막 문장과 함께.

 

    "드디어 <자유>를 찾은 것을 환영해. 그리고 돌아가서도 꼭 <자유>를 찾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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