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화요일, 인천공항 가는 길
짐은 대략 20kg가 되는 듯하다. 108일의 이번 여행에서 내가 꼬박 짊어지고 갈 배낭의 무게 말이다. 떠나본 적 없는 가장 먼 곳으로의 여행이었다.
잔뜩 꾸리고 여행을 떠나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공항버스 터미널로 배웅을 나와주었다. 도연이가 핫팩이며 간식 꾸러미를 바리바리 전하고는 곧장 출근했다. 지수랑 진경이는 조금 뒤 내가 탄 공항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안전한 여행이 되길 빌어주었다. 더없이 감사한 고마움이었다. 따뜻한 친구들의 마음을 흠뻑 느끼며 새삼 뭉클해져 벅찬 마음을 안고 공항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어라? 출발 항공사에서 메일이 와있었네? 제목이...... Flight delay: UA892 to San Francisco......? 뭐라고???’
이런. 출발 비행 편이 딜레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4시간의 딜레이란다. 나의 첫 목적지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여기서 4시간의 딜레이란 산티아고 도착이 4시간 뒤로 늦어진다는 말이 아니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이러하다. 시작은 인천 국제공항. 여기서 미국의 서쪽 끝인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간다. 그리고 다시 바로 동쪽 끝인 휴스턴 공항으로 이동한다. 그제야 비로소 산티아고로 가는 최종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이렇게 총 세 번의 비행기를 연이어 갈아타고 가야 하는 여정. 트랜스퍼할 시간적 여유를 두었지만 4시간의 딜레이로는 터무니없었다. 고로 이 4시간의 딜레이는 산티아고 도착이 순수하게 4시간 늦어지는 게 아닌 꼬박 하루가 늦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놀랍겠지만 항공기 지연은 예상했던 여행 중 시련 시나리오 파트의 하나였기에 다소 담담했다. 내가 예약한 것은 이 분야에서 이름 좀 날리는 유나이티드 항공. 이 분야라 함은 항공기 지연을 뜻하는데 이 외에도 비행에 관련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악랄한 경험을 선사하기로 유명한 항공사이기도 했다.
다분히 다 알면서도 완료한 티켓팅. 이유는 간단했다. 남미로 가는 가장 경제적인 루트였기에. 듣기만 해도 진이 빠지는 연이은 3번의 비행도 기꺼이 감수하리라 다짐하며 결제한 예약이었다. 그런 마음이 필요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여행의 시작부터 미국 공항 노숙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추가 보너스는 예상 못했지.
답답한 내 마음을 반영한 듯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펑펑 함박눈이 내린다. '이런 날씨에 비행기가 뜰 수 있나?' 싶을 정도의 폭설에 가까운 눈이다. 비행 편이 취소가 아닌 지연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버스 기사님도 오늘은 저기압이신가 보다. 출발한 지 이십 분이 채 못되었는데 벌써 클락션을 다섯 번이나 울렸다. 지금의 나는 그 소리를 충분히 셀 수 있을 정도로 고독하다. 그토록 고독하게 유나이티드항공의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본다. 받지도 않는 항공사 대표 전화의 자동 안내 음성을 들으며 통화 연결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본다. 시작부터 미국 공항 노숙은 피해야지. 뭐라도 방법을 찾으리라. 그렇게 전화기를 붙잡은 채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보세요?”라는 한 마디를 채 꺼내지 못하고 내내 통화 연결음만 듣다 공항에 도착하다니. 해결방안이 없네. 어쩔 수 없다 싶은 마음으로 항공사의 티켓 발권 창구로 향했는데 이거 예상밖의 분위기다. 코드셰어를 통해 다른 항공으로 비슷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가 오간다. 다행이구나. 한 시름 놓으며 발권을 위해 줄을 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지금은 뭘 타고 가든 제시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다시 휴스턴,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때였다. 근처 승무원의 무전으로 'SQ 자리가 없습니다'는 무전이 흘러나온다. 코드셰어를 통해 탈 수 있을 거라는 싱가포르 항공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갑자기 심장이 요동쳤다.
'항공기 지연 정도야 예상에 있던 시련 시나리오 중 하나’라며, '이번 여행은 일정이 기니까', '하루 정도 늦어져도 그래 여유 있다', '공항 노숙, 경험 안 해본 거 아니니까 괜찮아', 하면서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계산을 하고 있던 나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냥 제 날짜에 계획한 그대로 산티아고에 딱! 도착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여유 있는 척하더니 코드셰어라는 말에 '살았다!' 싶은 마음으로 몹시 반가워했다가 최종적으로 자리가 없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다니. 익숙함과 편안함을 벗어나 철저한 고독을 즐기고 오리라 다짐했지만 그 와중에도 잘 다녀오고 싶다는 속 마음이 강렬하게 반증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티켓팅하는 내 차례에 여석이 생겨 가까스로 샌프란시스코행 싱가포르 항공 SQ016 오후 5:40 비행티켓을 끊었다. 휴. 원래 타려던 비행 편 보다 20분 정도 여유도 있다. 나의 첫 중남미 여행. 비행기도 안 탔는데 이걸 시작이라고 해야 하나? 시작 전이라 해야 하나?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초장부터 참 버라이어티 하다.
아직 나는 한국인데 고작 공항으로 가는 반나절의 시간 동안 이번 여행에서 느낄 희로애락을 요약해서 경험한 기분이다. 바짝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켜 본다. 이럴 땐 술이지. 여행 전 급히 만들어 온 만능 라운지 이용 카드로 대한항공 라운지에 왔다. 얼음 하나 넣은 위스키 한 잔을 마신다. 아니 두 잔이 났겠어. 부디, 모쪼록 원만한 여행이 되길 바라며. 건배! 또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