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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라 Dec 03. 2019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겨울왕국(1): 엘사

-엘사는 끝까지 외로웠다.

* 이 글에는 겨울왕국 1, 2편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겨울왕국은 참 나를 많이도 울린 영화였다. 나에게 겨울왕국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엘사였고, 2가 나온 지금도 엘사다. 디즈니에서 엘사는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신화적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그걸 멋지다고 받아들이겠지만 내게 그건 슬픈 일이었다.



엘사는 어른이되 어른이지 못했다.


인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물리적으로 엘사의 시간은 흘러갔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녀는 어린아이였다. 몸만 컸다고 어른은 아니다. 모든 어른은,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아이를 품고 산다. 나에게 어른이란 그 아이를 이해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나에게 엘사의 'Let it go'가 그렇게 슬프게 들렸나보다. 엘사가 가진 카이로스의 시간은 흘러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뇌는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경험에는 흔적이 남는다.


인간은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채로 태어난다.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는 존재임에도 사랑받는다. 언어가 되지 못하는 옹알이를 해도 기뻐해 주고, 걸으려 하다 넘어져도 응원하며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어린아이일 때 받는 사랑은 모든 사랑의 시작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조건 없는 사랑. 장점도, 역할도 없어도 되는. 나는 그냥 존재만 있어도 되는 그런 때.




그래서 나는 신동은 어떤 면에서는 저주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 특별한 시간이 너무 짧아지기에. 사람이 아니라 능력으로 비춰지기 시작하면, 존재는 밀려나 버린다.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  엘사도 그랬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능력이 너무나 컸고, 한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본인조차 자신이 아닌 마법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엘사는 살기 위해 정말 애썼다.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상처 입혔다. 그에서 오는 두려움, 고통, 불안을 부모는 엘사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려버린다.


그들이 내놓은 해결방식에 엘사는 들어있지 않다.

문을 닫아걸고, 방에 갇히고, 동생과도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 장갑으로 아무와도 닿을 수 없게 자신을 감추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살라고 한다. 한참 부모한테 안기고, 예쁨받고 사랑받아야 할 나이의 아이는 자기의 능력을 먼저 알게 되고, 자기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모든 것에 겁을 먹게 된다. 완벽하지 않으면 다 부서질 테니까. 그렇게 엘사는 겁을 먹고, 완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겨울왕국 1편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단 한 명도, 엘사가 정 붙일 곳은 없었다. 동생도, 부모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엘사의 부모는 트롤의 한 마디에,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을 어린 엘사가 홀로 책임져야 할 일로 규정짓는다. 타인과 접촉할 수도 없고,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고, 자신을 누르는 것 외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게 성숙해지는 길이라며 문을 닫기를 강요당한다. 정말로 그 능력을 통제하려면 실수를 하면서 배워야 했다. 시도와 과정 없이 완성된 상태를 요구하는데 누군들 억울하지 않을까. 엘사는 그 억울함을, 슬픔을, 외로움을 자기혐오와 공포와 주입당한 책임감으로 누르며 살아왔다. 21살에 이르기까지.






엘사에게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곧 무서움이다.


대관식은 엘사가 처음으로 문을 열려는 시도였다.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그 무서움 사이로 스스로를 밀어넣어 극복해보려 한 것이었다. 장갑 하나에 의지해서. 장갑은 모든 걸 내던진 엘사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방어기제였다. 안나는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해도 그걸 뺏어버린다. 용기를 내서 내딛은 첫 걸음은, 문을 더 열지 못하는 엘사에 대한 비난, 몰이해, 다른 사람들의 공포심 어린 시선 속에 끝났다.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지 못했다.


숨겨왔던 모습이 억지로 들춰지자 엘사는 도망친다.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여태까지 그녀를 제대로 도와준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 결정이나 판단을 못 하게 되면 도망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안그러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렇게 키워졌으니까.

너는 무서운 일을 벌일 거라고, 그게 싫으면 떨어지라고 위협당하며 자랐다.

자기 자신부터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에게 세상 어디가, 어느 누가 안전할까.



답답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으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Let it go' 다.


두려움을 극복한 노래가 아니다.
Let it go 를 부르는 엘사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도망친 본인의 모습에 만족했다면 여기서 영화가 끝났겠지. 삶의 대부분을 짓눌려 있었다. 그게 옳다고 해서 스스로를 억누르고 살아왔는데, 그 노력도 결과도 문을 열어보려는 시도도 이해받지 못했다. 억울하고, 속상한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문제인 거라면 멀어져 주겠다는 노래다. 아무 일도 없는 곳으로 갔으니 나쁜 일은 안 생기겠지. 좋은 일도 생길 수가 없다.  


안나는 그런 엘사를 굳이 찾아간다. 애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강요로 보인다. 도망가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안나가 언니와 연결되겠다고, 이해하겠다고, 위한다고 한 행동 하나하나가 엘사에게는 다 상처와 실패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나를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죽일 뻔 하고, 두 손을 묶인 채 성에 감금당하며. 크리스토프의 말대로, 엘사가 산에 온 것은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였는데 그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어떤 리뷰에서는 엘사를 회피애착의 상징으로, 안나는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로 분석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엘사는 애착을 형성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아이였다. 상황과 키워진 방식으로 인해 할 수 없이 회피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자기 자신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엘사는 괴물(monster) 소리를 들으며 몰린다. 겨울왕국 1편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안나와 아렌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악역인 한스는 주인공들이 힘을 합해 물리쳤고, 엘사는 마을에 받아들여진 듯 보인다.



정말 그럴까.

1편의 엔딩에서 엘사를 이해하는 사람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선동에 휘말려서 엘사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았다, 멋대로 추앙할 대상으로 삼는 국민들과, 애정만 가득한 동생이 남았을 뿐이다.  


안나는 엘사와 같은 능력이 없고, 엘사와 같은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안나는 엘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고 기만이다. 모두가 웃으면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지만, 그 중 엘사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생을 남들과 다르게 살게 된다는 외로움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슬퍼해 준 사람마저 없다.







그래서 2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엘사만이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목소리.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섭다. 밤중에 자신에게만, 남들은 듣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음이 평화롭고 예뻐서 그렇지, 상황으로 보면 귀신이랑 더 비슷하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무서워했을 것이다. 안 들리는 척을 하고, 있는 힘껏 무시하고, 엑소시스트를 불러다 퇴치하려했을 수도 있다.


엘사는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엘사는 홀린 거다. 목소리가 자기 같아서. 자신의 능력 같아서. 엘사가 아렌델에서 충분히 행복했다면, 목소리에 홀렸을까. 겨울왕국 1편과 2편 사이의 시간이 3년이라고 했다. 3년 동안 충분한 내적 성장이 이루어졌다면, 안정되었고, 안 외롭고, 아렌델에 정 붙이고 살 곳이 있었다면 목소리 하나에 의지해 북쪽으로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사는 안나가 있고, 여왕의 자리가 있어도 외로웠다.

결국 아렌델에서 마법을 쓰는 건 엘사 혼자다. 아렌델 사람들은 엘사를 배척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도 없다. 그저 마법을 쓰는 우리의 아름다운 여왕님으로 대할 뿐이다. 그래서 엘사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더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고 한다.


노덜드라의 땅에 들어가고, 정령을 진정시키는 모든 과정에서 엘사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안나의 걱정은 애정임과 동시에 엘사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반응이다. 심지어 찾아낸 과거의 시간 속에서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부모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상처가 될 진실을 알고, 안나와 올라프를 밀어 보내고, 홀로 온 몸으로 목숨을 걸고 투쟁한 끝에 엘사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낸다.



찾아낸 자신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이며 정령이었고, 아렌델과 노덜드라의 뿌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사회에, 태어나 자라 다스리던 나라에, 자신의 손으로 구해낸 아렌델에 엘사의 자리는 더이상 없다. 정령들은 안나를 아렌델의 지도자로 선택했고, ‘당신은 여기에 속하잖아요’ 라는 한 마디로 엘사는 노덜드라로 옮겨진다.


결말 부분에서 노덜드라에 머물고 있는 엘사는 속할 곳을 찾은 걸까. 적어도 2편 안에서 엘사와 같이 애매한 위치에 있는 존재는 나오지 않는다. 자신을 찾고 정령들과 어울리는 엘사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받을 수 있는 곳으로 밀려나는 건, 행복한 걸까. 심지어 밀려난 곳에서도 자신은 다른 정령들과 다르고, 인간들과도 다른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겨울왕국 2편의 배경이 가을인 것은, 가을이 성숙하고 변화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엘사를 도로 얼어붙은 겨울로 보내는 계절로 보인다. 그녀는 과거에 대한 답도,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답도 찾았지만… 답을 찾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녀는, 정말 행복할까.




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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