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왕관의 무게
안나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언니와 이유도 모른 채 떨어지고, 계속 내쳐진 경험을 했는데도 밝고 사랑스럽게 자라났다. 문을 두드리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실패와 거절에 무너지지 않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건 현실에서 가지기 힘든 장점이다.
1편에서도, 2편에서도 안나의 의도는 좋았다. 안나는 엘사를 위했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의도가 상대방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해를 끼치려는 마음이 없어도, 안나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엘사에게 상처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안나가 싫다. 안나가 가진 그 많은 장점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본인이 가진 특성과, 연애할 때의 모습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연애의 모습은 다음 편에서 안나의 남자들의 성격과 함께 살펴보고, 우선은 안나가 가진 특징과 성격부터 분석해 보겠다.
디즈니에서 엘사가 신화적인 캐릭터라면 안나는 동화적인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그 말대로, 안나는 꿈 속에 산다. 그게 작중의 모든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일단 안나 본인이 가진 문제는 현실을 지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철이 없다. 안나가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즉각적이고 충동적이다. 사랑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특히 사춘기 소녀라면 더더욱). 애정에 목말라 있던 안나라면 특히 강했겠지. 게다가 열여덟이다.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십대 후반이면,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안나는 그냥 동네 처녀가 아니다. 한 왕국의 공주고, 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왕위를 계승받을 사람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게 본인이 아니라 한스라는 건 문제가 있다. 엘사가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짓눌려 있는 동안, 안나가 내린 결정은 자신의 로망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성별만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한스가 안나에게 한 건 전형적인 미인계다. 안나는 그에 넘어가서 옆동네 13번째 아들한테 나라를 팔아넘길 뻔 했다.
다음으로 안나가 사람을 대할 때의 문제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안나는 항상 애썼다. 자기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을 부를 때까지의 안나는 괜찮았다. 어린 안나가 보였던 건 오롯한 애정이었다. 적어도 이 때에는 엘사나 엘사의 부모님이, 안나에게 납득할 만 한 이유를 주어야 했다. 꼭 마법인 걸 밝힐 수 없다면 다른 이유라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겨울왕국 1편이 시작하면서, 대관식 날의 안나는 배려심이 없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누구는 이걸 안나의 입장에서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안나에게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할 만한 반응을 했을 뿐 민폐를 끼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안나는 십대 청소년이다. 충동적으로 사건을 일으키고, 세상에 자기가 중심인 거 같고, 이런 특성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여덟살의 안나는 아직 후계구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열여덟의 안나가 왕위 계승 순위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반대하는 언니에게 마냥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최소한 안나는 엘사의 걱정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대신 안나는 엘사의 장갑을 뺏는다. 이후에 크리스토프에게 엘사가 결벽증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장갑이 엘사에게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엘사를 공격하려고 한 게 아니라 대화를 위해 붙잡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 누군가가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게 옆에서 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든, 없는 부분이든, 멋대로 열어서 남에게 보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답답하다면 설명을 요청해야지.
성문을 연 것은 안나에게 처음인 만큼 엘사에게도 처음이었다. 이 날 모두의 앞에서 장갑이 벗겨지고, 능력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엘사는 차근차근,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볼 수 있었을 지 모른다. 자신이 남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 날 엘사를 도망갈 상황까지 몰아붙인 건 누가 봐도 안나의 잘못이다. 안나도 스스로 그걸 인정한다.
문제는 그 후로도 쭉, 안나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행동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왕족인 자신은 엘사를 쫓아가고, 성은 그 날 처음 만난 남자에게 맡긴다. 어느 모로 봐도 괜찮지 않은 선택이다. 외세에 나라를 넘긴 것도, 사람을 피해서 도망간 엘사를 굳이 쫓아가는 것도 그렇다. 얼음성에서 안나는 처음으로 엘사를 이해했다며 노래부르고, 엘사가 아렌델에 여름을 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외친다. 바로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엘사는 안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압박이고, 자신의 존재가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채인데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부분인가.
1편의 엔딩에서 안나는 엘사를 구하고, 아렌델을 구했다. 그게 칭찬받을 일일까? 내가 볼 때에는 수습에 더 가깝다. 안나는 자기가 쳐 놓은 사고를 자기가 해결하면서 찬양받는다.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던져 언니를 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악한 외세에게 화끈하게 주먹을 날리며, 같이 시련과 고난을 겪은 와중에 호감이 가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연애도 시작한다. 원하던 모든 것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안나가 엘사에게 준 것은 애정이지만, 이해는 아니다.
오히려 안나는 엘사에게 끊임없이 이해와 성장을 강요했다. 나에겐 그게 안나가 엘사의 애정을 잡고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나는 그럴 수 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안나는 알고 있었다. 엘사에게 자신은 특별하고, 엘사가 의지할 곳, 이해받을 곳, 받아들여질 곳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언니는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며 성을 뛰쳐나올 수 있었던 거다.
2편의 안나는 더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따뜻하게 남을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안다는 평을 듣는다. 분명 그건 안나의 장점이다. 특유의 반짝반짝함과 상큼함을 유지한 채, 마음은 더 강해졌다. 다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해서, 강한 마음으로 아렌델을 수장시킬 뻔 했다.
안나는 엘사가 모든 걸 공유하고, 자신에게 의지하고, 여행하는 내내 자신과 붙어있기를 바란다. 자신과 엘사의 능력에 대한 객관화가 안 된 채 맹목적으로 퍼부어지는 애정과 걱정은, 엘사에게 고스란히 부담이 된다. 불을 끄러 들어간 소방수를 구하겠다고 맨몸으로 뛰어드는 시민을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구해야 할 사람을 하나 늘리는 셈이다. 눈먼 애정은 엘사와 안나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렇게 안나의 애정이, 시선이, 관심이 모두 한 곳으로 쏠려있는 와중에 연인인 크리스토프는 내내 안나의 시간과 관심 한 조각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안나는 엘사를 놓기가 싫은 거다.
정령들이 안나를 여왕으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나는 안나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안나는 과거의 진실을 알게 되자 댐을 부수기로 결정한다. 그게 옳은 일이니까. 적어도 나는, 자기 손으로 나라를 갖다 바치는 왕 아래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인명 피해가 없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결과적으로는 아렌델이 무사했다. 하지만 안나가 결정을 내릴 때, 자기 생각에 옳은 일이라는 것 외에 아렌델 국민들의 삶, 생활, 미래, 자신의 목숨, 크리스토프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에게 왕국을 맡기면 평화로울까? 안나가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위한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 내고, 타국과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교역과 협상을 맺을 수 있을까?
안나는 원하는 걸 모두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당할 그릇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