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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라 Dec 09. 2019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겨울왕국(3): 안나의 남자들

-사랑과 전쟁


겨울왕국은 여러모로 기존의 디즈니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동안 디즈니에서 보여준 연애는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물론 동화라는 특성에 기반한 비현실성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인 반쪽을 만나서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꿈과 같은 연애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오로라, 자스민의 인생에서 연애란 단 한 번, 한 사람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보는 일도 없고, 짝을 놓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안나는 두 번의 연애를 한다. 먼저 한스와, 그 다음번엔 크리스토프와.  


작중에서 한스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안나와 한스가 한 것은 연애가 맞다. 한스에게 다른 속셈(결혼사기)이 있었다고 해도. 안나가 느꼈던 건 연애를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는 감정 아닌가. 첫사랑, 설렘, 기대, 실망, 실연 이라는.




우선, 한스는 작정하고 안나가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감성이 풍부한 안나가 자극당할 만 한 상황으로 유도했고, 안나가 가지고 있던 결핍과 낭만을 채워주는 말과 행동을 했다. 안나가 한스의 미인계에 넘어간 건 본인이 순진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스가 전략을 잘 짜서 체계적으로 유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생긴 왕자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가 나를 구해주고, 몇시간 후에 무도회에서 재회한다.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설렐 법 한데, 한스는 안나의 대화에 맞춰서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Love is an open door를 부르면서 안나가 바라 마지않던 자신을 밀쳐내지 않고 사랑해줄, 운명적인 사람의 자리에 슬그머니 자신을 끼워넣는다. 그러니까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진정한 사랑(true love)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 같은 느낌을 받으니까. 게다가 엘사가 반대하면서 같이 시련과 역경도 겪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다. 아는 것도, 검증된 것도 없지만 옆에서 반대하니 일단 사랑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


한스가 자기 입으로 계획을 털어놓기 전까지, 안나와 한스의 만남은 전통적인 디즈니 프린세스들이 밟았던 길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간으로 압축했을 뿐이지, 운명적인 만남, 친밀감 형성, 만남을 방해하는 사건,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시련의 극복.






분명한 건 안나를 유혹할 때나, 안나의 대리로 아렌델을 지휘할 때나, 한스는 머리가 좋다. 악역으로 나와서 그렇지, 행동만 놓고 보면 엘사나 안나보다 왕에 적합한 재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안나가 나갔다 돌아온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아렌델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한여름에 찾아온 겨울 날씨에 사상자가 나지 않도록 대처를 잘 하고, 정치 구조를 파악하고 왕이 될 계획도 세웠다. 사실 거의 이루기까지 했다.


안나한테 자기 입으로 털어놓지만 않았더라면, 안나가 얼어붙고, 엘사가 상심해 떠나고, 정말로 아렌델의 왕은 한스가 되었을 수 있다. 늘 입이 문제다, 입이.








그럼 크리스토프는 왜 안나와 사랑에 빠졌을까?  


투박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사실 크리스토프도 안나를 구해주며 만남을 시작했다. 안나의 입장에서는 호감일 수밖에 없다. 같이 엘사를 찾으러 떠나고, 늑대들을 걷어차고 절벽을 뛰어넘었으면 상대가 동성이라고 해도 끈끈한 동료애 정도는 생긴다. 한스와 안나 사이에 자라난 건 이성에게 느껴지는 설렘과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지만, 크리스토프와 안나 사이에 먼저 자리잡은 건 신뢰와 인간적인 호감이다. 그 위에 크리스토프의 헌신으로 낭만이 쌓인다.



크리스토프와 안나 모두
사랑에도, 이성에도 면역은 없지만 로망은 있었다.

의외로 크리스토프는 안나와 비슷하다.  

성장한 환경 자체가 로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가족같은 트롤들에게 진정한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정작 인간 여자와의 접점은 별로 없을 상황이니까. 오프닝에서 얼음을 캐는 사람들도 죄 남자로 나오고, 얼음 사업을 하면서 스벤과 둘이서 여기저기 떠돌았을테니 여자와 오래 함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함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예쁜 여자가 옆에 있다. 마음이 안 가는 게 더 이상하다. 게다가 얼어가는 안나를 마을에 데려다주고, 떠나오고, 다시 되돌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 마음에 대한 확신도 가지게 된다.



크리스토프는 안정적이다.

안정애착이기도 하고, 사람 자체도 변화가 크지 않아 보인다. 안나가 로망을 가지고 꿈을 꿨기에 한스에게 나라를 넘겨줄 뻔 했다면, 크리스토프는 로망이 있지만 땅에 발이 닿아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모든 걸 내버리는 일 없이 현실의 관계에 충실할 수 있다. 3년동안 쌓아올린 관계와 애정은 단단하다. 노덜드라 숲에서 안나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났음에도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관계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2편의 안나는 내내 크리스토프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으며, 연인을 불안애착으로 만들 수 있는 행동들을 했다. 그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크리스토프의 마음이, 안나에 대한 애정 뿐만 아니라 본인의 중심이,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안나가 보인 자기중심성이 없다는 것이다.

올라프가 지적했듯이, 자기가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보내줄 줄 안다.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일 없이 애정을 줄 수 있다는 것과 한 사람을 그 자체로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관계의 기본이지만, 생각보다 드문 능력이기도 하다.


관계가 깊어지려면 로맨스 외에도 쌓아 올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함께 있다든가, 내 편이라든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 한스와 안나의 사이에는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운명만 있었을 뿐. 크리스토프는 1편에서 시작해, 두 편의 단편을 거쳐 2편에 이르기까지 차근히 안나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안나의 과거를 알고, 그녀가 살아온 환경을 이해하며 그녀를 사랑한다. 안나의 좋은 점만 골라내어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세련되지 않더라도 안나를 귀하게 대하려 노력하고, 그녀가 살아온 방식을 따르려고 해본 적 없는 넥타이를 매 보기도 하고, 삶과 감정을 공유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변함 없는 믿음과 애정을 준다. 일단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위해 노력하며, 안나의 선택과 행동을 지지한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와 안나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크리스토프는 ‘내 사랑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같은 소리를 하는데,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작중 내내 안나의 안에서 우선순위가 밀린다. 1편에서는 연인이 아니었으니 그게 당연하다. 3년째 만나고 있는 2편에서는? 엘사의 기분에 밀리고, 엘사를 따라가는 데 밀리고, 안나가 내린 결정에 연인의 존재는 들어있지 않다. 그저 크리스토프의 수용, 지지, 도움만 있을 뿐.


2편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프는 안나가 여왕이 된 걸 축하해주는 모습으로 나온다. 크리스토프는 분명 좋은 연인이고, 좋은 남편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좋은 국서일지는 모르겠다. 자기의 얼음 사업을 하던 사람이고, 순록과 어울려서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국서라는 위치에 매여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리고 여왕이 되어 한층 더 바빠진 안나가 크리스토프에게 충분한 애정을 줄 수 있을까.


자매애가 강조된 영화였다고는 해도,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프의 입장은 조금 아쉽다. 충분히 능력 있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데 사랑받는 모습은 나오지 않아서.  



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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