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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Jul 16. 2019

근황

사표의 의미

36   근황


사직 후 한 달 반 정도가 지났다.

오늘 나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상태, 법륜스님 말씀에 의하자면 '평온'한 상태다.

사표를 결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사표 제출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감행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리도 힘들어했구나 싶다.

신체의 성장은 멎어도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냥 허송세월만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더 경험하는 것, 더 알게 되는 것, 더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인지.


개인 메일로 혹시 후회되지 않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느꼈고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꿈같은 생활은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안되도록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고.

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언급하지 않은 말이 있다.

첫 한 달은 그리 이상할 수가 없었다고. 근거 없는 죄책감 같은 것도 들었다고.

오랜 시간 정착된 바이오리듬을 거스르는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조금 우울했다고

이 우울감이 후회인지 환경변화로 인한 부작용인지 구분하느라 조금 혼란스러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분이 아쉬울 정신없는 출근 시간에 조금 여유롭게 늘어지는 것, 지하철의 규칙적인 소음과 진동에 익숙할 시간에 고요함 속에 놓이는 것, 갑작스럽게 마을에서 학부모를 만나 어색해지는 것.

불쑥불쑥 공격받듯 이런 낯선 것들에 대응해야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요즘 새로운 바이오리듬을 만들고 있다.

오전에 운동을 하고 짧은 거리를 운전한 후에 카페에서 글을 쓴다.

이 생활도 20일을 넘기니 이젠 몸도 마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무슨 보험 하나 들어놓으려는 요량으로 각종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있다. 아직 좋은 소식은 없다. 새로운 매거진을 발행하고 있는데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무서울 지경이다.

브런치 인기글에도, 인터넷 베스트 글 순위에도 여러 번 올랐고 아마도 그즈음 내 글을 접한 출판사 관계자가 생활밀착형 에세이집을 내고 싶은데 의향이 있는지를 문의했다. 출간제의가 들어온 거다. 유발 하라리 같은 어마어마한 작가의 글을 즐겨 읽는 남편은 출간제의가 있었다는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다.


출간제의가 계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나에게 출간을 제의한 편집자의 의견과 달리 출판사 대표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내 인생에 -어쩌면-꽃길을 마다하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한 것 남편 승진과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회사에도 나는 글이 쓰고 싶어 사직했다기보다는 남편이 잘 나가서 사표 쓴 팔자 좋은 여자로 남아있다.

나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걸까? 남편의 승진과 나의 사표 제출이라는 순차적 사건 사이에 존재한 온갖 상황들을 설명해야 하나? 최적의 상황을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고 설명해봐야 아무 소용없을 거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나는 출판사에 알겠다는 취지의 짧은 메일을 보냈다. 나는 한 동안 사람들과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이런 의심을 받을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젠 밤마다 내일 출근을 걱정하며 좀 더 놀자는 아이에게 칼같이 취침시간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확실히 가사노동이 많아지긴 했다. 큰 아이가 늦게 와서 저녁밥을 두 번 차리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배고픈 아이가 내가 해 준 따뜻한 밥을 볼이 미어져라 먹는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잘하고 있다. 조급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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