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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Jul 11. 2019

특별히 내조랄 것도 없었다

누구나 승진직 후 한동안은 승진 전과 후의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남편도 그전에 하던 일의 포지션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러다 남편이 먼저 번아웃되겠다 싶어서 나 역시 회사와 집을 오가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가급적 남편은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노력했다.


남편이 임원인 아내는 어떤 특별한 내조를 할까 궁금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특별한 게 없다고 하면 좀 김 빠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게 사실이다.

나도 집에서 회사에서 온갖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일에 투자하는 절대적인 시간과 책임의 무게는 남편이 더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결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분야에서 지치지 않는 열정을 쏟고 있었다.

가치로운 일이다. 도와주고 싶었다.



주말이고 일요일이고 남편이 출근할 때는 그러려니 했고, 힘들다고 빨리 올 수 없냐는 소리 해보지 않았다. 여름휴가 일정을 여유롭게 일찍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막상 휴가를 가도 갑자기 일이 생겨 남편 혼자 회사에 복귀해야 하는 상황도 매년 발생하는 것 같다. 국내에 있으나 해외에 나가나 마찬가지다. 모든 걸 그러려니 한다. 휴가의 나머지 일정은 내가 운전사, 가이드, 엄마, 아빠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

그래도 남은 사람이 낫지, 갑자기 회사에 호출되는 사람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흔한 녹즙이나 생과일주스같은 것은 남편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하도 몸이 축나는 것 같아 보여 내 맘대로 보약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결국 한 팩 먹고 나머지는 다 버리는 사태 후는 남편이 요청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조의 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내조 잘해서 남편이 성공 가도를 달리도록 뒤에서 조력하는 아내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런 허무맹랑한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성공하려면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밤에 회사 동료들이 불쑥 찾아올 일도 없을뿐더러 아내가 타라~ 마법 부리듯 요리 솜씨 발휘할 일도 없다.

드라마는 왜 그렇게 비현실적인 얘기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거의 밖에서 밥 먹고 오는 사람이라 아이들 음식만 신경 쓰면 되었는데 그래도 특별히 일요일 저녁은 어른 음식으로 정성 들여했다.

남편이 지나가는 말처럼 무언가 먹고 싶다고 하면 기억하고 있다고 해주었다. 그러면 한 그릇 뚝딱 먹고 좀 기운을 내는 것 같았다.

뭐 특별한 걸 먹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갓 지은 따뜻한 밥에 지글지글 김치찌개, 노릇노릇 고등어 구워 맛있게 먹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 같다.

잔소리하지 않는 것, 어느 무엇과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좀 더 잘하라고 압박하지 않는 것.

마음에 조급함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중에 승진한 후에 당연히 될 줄 알았다고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이렇게 분위기만 만들어 주고 나머지는 본인의 몫이다. 쓰다 보니 고3 아들 대학 보내는 것 같다. 아직 자식을 대학에 보낸 경험은 없지만 무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주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동소이할 거다. 쓰다 보니 나를 무슨 완벽한 사람처럼 쓴 것 같은데 최대한 노력했어도 이 매거진의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했듯이 참다 참다 한두 번씩 잔소리하면 그렇게 싫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김윤석이 박소담에게 실컷 부마 의식을 행한 후에 의식을 잃은 박소담에게 '영신아 네가 다 했다'면서 안타까워하는데 딱 그거다. 승진하려면 본인이 다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서 분위기를 만들어 준 아내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내 얘기가 아니라 모든 아내들에 대한 얘기다.-

특별히 내조랄 게 없어 보여도 회사에서는 저 직원의 아내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지 아닌지 다 안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남지 않지만 모든 것이 비공식적인 평가의 대상이 된다.


남편이 임원이 된 그다음 해 내내 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 다른 방법을 고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 거리 출퇴근의 full-time job은 힘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단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일도 사람 관계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나의 딴생각이 회사에 알려지면서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힘든 시간들이었다. 나는 나를 좀 쉬게 하고 싶었지만 십수 년을 지배하던  관성의 법칙이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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