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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Jul 04. 2019

승진의 파급효과

남편은 내가 복직하고 1년 남짓 되었을 때 임원이 되었다.

나는 그때 회사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갑자기 야근해야 하는 날도 있었지만 싫지 않았다. 어른들과 함께 어른들 대화하면서 야근하는 내가 꽤 멋져 보였다.  나는 성과를 위해 전략적이고 속도감있게 일했다. 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게 나를 새롭게 돌아보는 시간들이었다. 전문가 면담 참석 대상자에 내가 빠진 걸 알고 열 받아서 울었다. 빨리 승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었다. 다행히 건강하고 무던한 아이들이라 육아도우미와도 잘 지냈다.

그날도 육아도우미를 보내고 아이들 재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승진했어.'


나는 그 문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낯설었다. 남편이 임원이 되다니.

한 동안 잊고 지내다가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순간에 예전의 간절한 바람이 갑자기 떠올랐다. -쉴 때는 남편이 언제쯤 임원이 되나 궁금하고 기대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황당한 답문을 보냈다.

'축하해. 먼저 잘게'



다음날 남편을 만났을 때 조금 이상했다. 남편은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어색하고 이상하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뒤로하고 당분간 기뻐하기로 했다.


남편이 회사에서 별을 달았는데 주위에 널리 알릴만했지만 나는 부모님과 회사 가까운 동료 몇 명에게만 알렸다. 남편한테 좋은 소식이 있어서 한 턱 낸다고 해도 모두 축하해 주었을 텐데 그 무렵 '나는 나고 남편은 남편이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편이 승진한 것이 한 편으론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열등감으로 인한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외국 어느 나라 대통령의 아내가 여전히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계속 일한다는 기사를 인상적으로 보았던 나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며 너무 앞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도 천천히 알렸다. 남편 거취에 변화가 있는 친구들이 있어 조심스러웠다.



남편은 임원이 된 직 후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제 막 중요한 직위에 힘겹게 적응하는 남편에게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투덜댈 수도 없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집 안의 모든 일은 나에게 몰렸다. 이 매거진의 1편에서 적었듯이 집과 아이들과 관련한 모든 일들, 학교와 관련한 모든 일들-선생님 면담, 공개수업, 각종 봉사활동, 각종 준비물- 아이들 먹거리를 주말에 모두 준비해야 했고 남편에게 부탁했던 딱 두 가지도 결국 내 몫이 되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은 계획을 세워서 하면 되는데 갑작스러운 일-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요, 아이가 다쳤어요, 엄마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이 없어-까지 모두 할 수 없어 여기저기 부탁해야 했다. 그렇게 잘 견디던 나는 가끔씩 폭발했고 어떤 날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치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했는데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아주 가끔 일요일에 혼자 돌아다니곤 했다. 생전 싸우지 않던 우리가 말다툼을 하자 아이들이 무서워했다. 둘째가 숨기도 했다.  상황은 좋았다 나빴다 했다.


교통사정이 좋아졌지만 출퇴근 시간은 그대로였다. 나는 매일 3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감당하고 있었다. 내가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유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를 오가며 책도 보고 영어강좌도 듣고 이런저런 소일거리들을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회사 근처로 이사하라는 말을 쉽게 했다. 그러나 나는 복잡한 서울이 싫었다. 또 아이들은 학교를 너무 잘 다녔다.  나는 그냥 나 혼자 고생하기로 했다.

처음엔 지각하기 않기 위해 어린 둘째를 닦달해서 겨우 2-3분 차이로 지각을 면했지만 하루 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그 어린아이의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지각을 선택했다. 회사 동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누구 하나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침마다 눈치가 보였다.   



육아도우미는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잘했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만해야겠다고 했다. 처음 약속과 다르게 늦게 오는 날이 많다는 이유였다. 월급을 올려드렸다.

그 무렵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회사에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육아도우미에게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무렵 내가 보낸 문자에는 '죄송한데요'로 시작하는 문자들이 많다.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지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이제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조금만 참아봐 하는 뻔한 소리만 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떨까 하는 소리에 엄마는 질겁을 했다. 부모님은 사위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은근히 내 직업도 아까워하셨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은 너무 힘들면 그만하는 것도 좋은데 내가 후회할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나는 아무 잘못없는 남편에게 어차피 내가 그만두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거 아니냐고 억지를 썼다. 후배들 계속 승진을 했다. 그들은 내가 선배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자존심 상했지만 웃으면서 축하해 주었다.

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 듯 했다. 어떻게 해야 나와 가족이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무렵부터 나는 긴긴 고민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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