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인 둘째는 아들이라서 그런 걸까? 요즘 힘이 넘쳐난다. 새벽부터 요즘 한창 재미 붙인 줄넘기를 하고 유치원이 끝나면 태권도장에 갔다가 집에 오자마자 킥보드와 줄넘기를 챙겨서 최근 생긴 인근 공원에서 한바탕 놀고도 부족한 모양이다.
오늘도 공원에 가기 위해 서두르는 길에 유치원 친구를 만났다. 둘째가 은근히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어디가? 우린 앞에 공원에 놀러 갈 거야" 넌지시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어떡하니, 오늘은 새로 시작한 수업을 있어서 안 될 것 같구나"라고 말하며 바쁘게 엘리베이터를 잡는다.
부모역할에 충실한 그 엄마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수업의 커리큘럼과 강사들을 비교하여 아이를 위한 최선의 수업을 선택한다. 적응할 시간을 준다고 1년에 한 두 개씩 수업을 선택할 뿐인데도 아이의 학교 외 수업은 자꾸만 늘어난다. 급하게 서두르는 엄마 손에 이끌려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조심스럽게 의문을 가져 본다.
저 엄마도 엄마 역할은 처음인 것이 틀림없다. -그 아이는 외동아들이다.- 과거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엄마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는지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힘들지도 않고 끝도 없이 무언가를 찾고 비교 분석한다. 그러다 아이가 엄마 기대에 부응한다 싶으면 이거 큰일이다. 이 정도로는 안된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 몸에 병이 날 정도로 열심히 한다. 아이가 크면서 자기주장이 생기고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며 변해갈 때, 엄마는 전혀 변하지 않으며 비극은 시작된다.
열심히 하면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아이의 눈부신 성장에 맞춰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데 아이는 이젠 엄마 말대로 하지 않겠단다. 그럼 엄마가 그동안 해온 것은 뭐란 말이야? 내가 그동안 뭘 한 거지? 자괴감에 빠진다.
부모는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 거다.
과도한 부모의 열정은 아이의 열정을 집어삼킬 수 있다.
김연아 같이 타고난 천재의 열정과 그 부모의 열정이 합쳐져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된 것 같은 특별한 경우는 제외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대다수에 해당하는 우리 범인(凡人)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은 소중한 것을 위해 과하게 노력하고 기대하고 좌절하고 심하면 분노한다. 그 마음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저 혼자 뭐 좀 해보겠다고 정상적으로 반응하는데 부모 경험이 처음인 우리는 멘붕에 빠진다. 좌절한다.
"누가 하라고 했어? 내가 부탁했어? 엄마가 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복창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너무 화가 난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화가 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물론 요즘 엄마들은 다들 세련되어서 그런 신파조의 말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온갖 그런 생각뿐이다.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나도 숱하게 했다.
나는 첫 아이 때 조금 미쳤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것도 괜찮은 수업을 알아본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했다. 첫째가 다섯 살때, 한글을 뗀 것을 시작으로 독서와 영어와 수학까지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100% 내가 주도적으로 했다. 일간, 주간, 월간, 학기별, 방학별 치밀한 계획하에 미루는 것 하나 없이 쭉쭉 진행했다. 천성이 순한 아이는 엄마를 잘 따랐다. 그만큼 괄목할 만한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나는 이렇게 하면 되나 보다 했다.
아이는 -한글과 영어-언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 손가락 짚어가며 음원 소리 듣기를 함께 했고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미국 아마존 중고서점을 뒤져서라도 찾아내 아이가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했다. 절판되어 살 수도 없고 인근 도서관에도 없으면 1시간을 운전해서라도 바로 그 책을 찾아와 아이에게 갖다 주었다.
아이는 쭉쭉 성장했다. 나는 매일매일 3년 개근으로 아이의 학습일지를 기록했다.
한번 하기로 한 것은 누구도 못 말리는 성격이라 나의 불같은 열정은 5년이 되도록 수그러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아이가 얼마나 숨통이 막혔을지.
아이는 나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변에서 아이를 칭찬할 때마다 나의 자부심은 커져만 갔다.
아이가 4학년이 되고 위기가 찾아온다. 서서히 아이의 자아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거부했다.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고 사정도 하며 같은 패턴을 유지하고자 했다. 화가 나서 때린 적도 있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결과는 실패였다. 나의 열정이 아이의 열정을 집어삼킨 거다.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다. 곧 중학생이 된다. 아이는 정말 신나게 학교를 다닌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친구들 얘기를 잘 들어주어서 인기도 많단다.
나는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한다.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란다. 공부가 아니라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불법이나 부도덕한 것만 아니라면 그걸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은 공부 아닌 다른 것은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지라 아이가 자기 본분에 최선을 다했는지는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닌지로 판가름되곤 한다. 슬픈 현실이다.- 어른도 깨닫기 힘든 것을 아이에게 기대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기대를 하면서 잘못된 방법을 쓰고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행히 그 동안 깨달은 바가 있어 아이에게 자유와 권한을 조금씩 넘기고 있다. 아이 학습과 관련하여서도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학교에서 새로 배운 것, 그 동안 잘못 알고 있던 것. 친구가 모르고 있어서 자기가 가르쳐 준 얘기 같은 것들을 말하면 잘 들어둔다.
점점 더 부모는 많은 역할과 권한을 아이에게 넘겨야 한다.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며 아이의 인생을 아이에게 맡기고 지켜보는 것. 최대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 그래야 작은 불씨라도 아이의 열정이 완전히 꺼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아이의 성장에 따라 아이에게 권한을 양도하는 범위도 수시로 변한다. 그 접점을 찾는 것이 또 다른 난제이다.
유치원생에게는 혼자 등원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
초등 저학년 때는 알림장을 스스로 챙기게 하는 것.
초등 고학년 때는 학습 준비를 스스로 하게 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이의 꿈을 찾아주려고 동분서주하지 않는 것.
아이 눈에 눈곱이 끼어 있고, 허술한 준비로 선생님한테 혼이 나도 엄마가 나서서 해 주지 않는다. 앞으로 주의해야 할 점을 일러주기만 한다. 손 놓고 방관하고 부모 인생 살자는 말이 아니다. 아이가 주인공이고 엄마는 보조자의 역할 정도만 하자는 말이다.
부모의 십자가가 무거운 진짜 이유. 그건 부모의 본성에 어긋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며 조금씩 권한과 역할을 넘기고 아이가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잡지 않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 아닐까?
" 엄마, 쟤는 안 놀아?"
" 응, 무슨 수업이 있나 봐, 우린 놀러 가자!!"
우린 최근에 산 킥보드를 타고 바람 가르며 신나게 놀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