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해서 여기저기 동아리를 많이도 기웃거렸다.
딱히 하고 싶은 활동이 있던 게 아니었기에 좀 더 폼나 보이는 곳 위주로 왔다 갔다 했다.
동기가 약했기에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부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한두 번씩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곳은 봉사동아리였다. 매달 한 두 번씩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거나 놀아줬다. 고아원에 방문할 때는 아이들이 좋아할 과자를 한 무더기 가져갔다.
동아리 선배들과 놀라간다는 생각으로 딱 한 번 갔을 뿐인데 그 날의 그 장면은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서울 시내 어디쯤이었다. 조금은 삭막한 느낌의 고아원이었다.
건물 하나 덩그러니 있고 건물 앞에 관리되지 않은 공터가 꽤 넓었다.
가을볕이 따사로워야 하는데 그곳은 차가웠다.
깊은 가을이라 마를 대로 마른풀들이 손목에 닿아 미세한 상처가 났다.
우리를 발견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듯이 뛰어 왔다. 그 아이들을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은 평소 내가 보던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이의 몸으로 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눈치 보고 발버둥치며 살았을 눈이었다.
그 눈빛이 무서웠다. 어린아이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눈빛이 나오는지 나는 무서웠다.
아이들은 우리들을 에워싸고 떨어질 줄 몰랐다.
캄보디아에 여행 갔을 때 여행객에게 '1딸라, 1딸라' 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차라리 순진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짐승의 눈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날 충격을 받은 나는 더 이상 동아리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도망쳤다. 아이들이 무서워서 도망쳤다.
그 아이들의 눈빛을 가까이서 보았던 그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하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한 두 번 왔다가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다들 나와 비슷하게 충격받았겠지.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텐데...
나는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그 아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희망만 주고 상처만 남긴 수많은 어른들 중에 한 명으로 남았다.
어느 조금 느긋한 오후였다.
TV를 통해 기부단체 광고가 나온다. 단순한 광고가 아니고 아프리카 어느 마을 남자아이의 일상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 아이는 다섯 살이다. 그런 다큐가 의례 그렇듯 부모님은 아파 누워있고 돌봐야 할 동생도 있다. 그 아이는 나무를 해서 돈벌이를 한다. 작은 몸뚱이가 들기에 나무를 베는 칼은 너무 무겁고 거친 바닥에 맨 발을 수도 없이 긁힌다.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은 일상이다. 아침부터 한참을 걸어 나무를 하고 또 한참을 걸어 집에 온다.
나무를 내려놓더니 신나서 어딘가로 향한다. 아이는 어디를 가는 걸까?
아이는 학교에 가고 있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가려면 진짜 열심히 가야 한다.
학교에 도착한 아이는 실망한다. 학교 문이 닫혀있다.
아이는 다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무슨 그런 다큐를 찍었는지. 제작진들이 시간이라도 알려주지. 지금 가도 학교는 끝났다고...
기부금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를 쓴 건가?
사정은 모르겠고 나는 그 날 펑펑 울었다. 어린 내 아들이 생각나서 더 울었다.
그 아이의 해맑은 눈동자에 과거 내가 진 마음의 빚이 겹쳤다.
'내가 그 날 어린애들을 그렇게 팽개쳤구나.'
나는 바로 전화해서 정기기부를 약속했다. 이젠 세상에 진 빚을 갚을 때가 되었다.
도심에 살아서인지 이 곳은 다들 비슷하게 산다.
그런데 뉴스나 다큐나 인터넷 광고를 보면 내가 알 수 없는 곳에 수많은 아이들이 가족을 챙기며 살아간다.
엄마가 된 이후로 세상에 슬픈 일들이 너무 많다.
왜 그리 험한 뉴스들이 많은지. 아이들을 학대하는 뉴스 동영상은 무서워서 차마 볼 수가 없다.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얼키설키 엮여 있다.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팔 할의 바람에 기대어 살아갈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도 시인처럼 바람 속에서 방황과 시련을 겪을 것이다.
세상 아이들은 세상이 함께 키우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바람이 되어 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 아닐까?
나는 매달 3개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한다.
정기 기부 말고도 뉴스를 보다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연들도 많다. 이런저런 1회성 기부들을 한다.
어릴 때 진 마음의 빚을 이렇게라도 갚아 가고 있다.
그래도 나이 들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연이겠지만 어떤 단체를 통해 결연을 맺은 아이가 첫째와 동갑이다.
그 아이는 매년 몇 회씩 편지를 보낸다. 간단한 영어로 자신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나중에 크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써서 보내는 식이다. 간단한 답장을 보냈는데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다.
매번 답장을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뭐 그리 좋을까?
그냥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내가 세상에, 또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따스한 바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