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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Nov 19. 2019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비극이 있다

브런치 북[여자 이야기]중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처음엔 소설로 난리더니 지금은 영화로 난리다.
어느 인터넷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에서 또래 여성들의 공감을 일으키고 사회적으로도 반향이 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다가 첫 부분의 충격적인 장면 이후로 지지부진한 전개 때문에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미루어 짐작되어 읽기를 중단했었다.

그 [82년생 김지영]이 최근 영화로 개봉했다.
나는 동네 학부모들로부터 공유를 남편으로 두고도 그리 힘드냐고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고도 한참이 지나고야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김지영은 80년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둘째 딸이다.
해외출장을 다녀온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만년필을 사준다거나 엄마가 음식을 하는 사이 딸들은 밥상을 차리는 등의 모습이 어릴 때 많이 보았던 상황들이다.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한 김지영은 아버지로부터 여자(피해자)가 옷차림이 그리 조신하지 않으니 남자(가해자)한테 그런 꼴을 당하는 것 아니냐며 혼이 난다.
결혼 후에는 어서 자녀를 가지라는 시어른들의 말씀에 스트레스를 받고
출산 후에는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그렇지 어떻게 앞길이 구만리인 남편에게 육아휴직을 시키느냐고 시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는다.
김지영은 아프다. 해 질 녘이면 가슴이 쿵 내려앉고 스트레스가 극한으로 치달을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때론 외할머니로 때론 엄마로 때론 대학 선배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울었다.
특히 오빠들 공부시킨다고 정작 제일 공부를 잘했던 김지영 엄마가 일찍 취직을 해야 했고 미싱에 손을 다쳐온 것이 너무 슬펐다고 외할머니로 빙의된 김지영이 자기 엄마를 향해서 말할 때 너무 슬퍼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 셋을 다 잘 키우고 지금도 조기 퇴직한 남편과 함께 죽집을 해서 돈을 벌고 아픈 딸에게 엄마가 근처로 와서 아이 돌봐줄게 라며 김지영을 위로하는 김지영 엄마가 너무 안타까워서 펑펑 울었다.

정작 주인공인 김지영은?
시어른들 말에 뭐 그리 일희일비할까?
남편이 육아휴직을 할지 말지는 부부가 결정하면 된다. 주변 말에 왜 그리 시달리는 거지? 불만이다.
나는 애가 둘인데, 애가 셋넷인 사람도 있는데 아이 하나가 그리 힘들었을까?
아이가 오전에 어린이집에 가면 그 시간을 알차게 이용해서 경력을 이어갈 수도 있을 텐데 대체 그 시간에는 뭐 하고 있었던 걸까?
김지영이 이해되지 않는다.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75년생 김지영이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비극이 있다.

                                                                        

아이가 하나이든 둘이든 셋이든 여성이 출산을 하고 전적으로 육아를 도맡으면서 여성성이 무참히 부서지고 사회참여가 단절된 상황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아기와 하루 종일 부대끼며 엄마로 거듭나기 위해 몸살을 겪는 김지영을 향해 너는 나보다 더 괜찮은 상황인데 왜 그것도 견디지 못하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가해자다. 82년생 김지영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뒤에서 잘생긴 남자 배우 얘기로 농담들을 하는 다른 김지영들과 함께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드는 공범이다.

                                                                  

50년대, 60년대 김지영들이 더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대학공부는 고사하고 출산과 육아는 당연히 여성의 몫이고 양성평등이라는 말이 존재조차 하지 않던 상황에서 숨 죽이며 자녀들을 억척스럽게 키워냈는데 지금 배울만큼 배우고 아이 한 명 키우는 것이 뭐 그리 힘드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김지영 시어미니 세대의 모든 김지영과 내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럼 이제부터 82년생 김지영을 한번 이해해 보자.

김지영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울감의 원인은 거기에 있다.
김지영이 정신과 의사에게 가끔은 누구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사는 것도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김지영은 배울만큼 배우고 나름의 꿈도 있었다. 그러나 악착같던 여자 팀장이 결국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마치 숨을 쉬듯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사회의 분위기에서, 김지영은 결혼한 여자의 전통적인 역할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강요된 행복 속에 갇힌 김지영은 어떡하든 일상을 살아보려 하지만 매번 낯선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며 좌절되고 만다.
커피 한잔 사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커피숍에 갔다가 여긴 애들이 왜 이리 많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다가 커피를 쏟는 바람에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떡하든 행복을 찾아보려는 김지영에게 이 사회는 결코 관대하지 않다.
도대체 김지영 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우리는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 모든 김지영들은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삶의 경로를 통과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신체가 차이나는 남성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출산과 육아로 인해 여성이 겪는 고통을 알 수 없다. 잘되겠지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만 볼뿐 병이 나서야 겨우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는 상황에서 김지영이 얼마나 족쇄를 풀고 자발적인 삶을 살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우리 김지영들 뿐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남성들이 축구공에 음낭을 심하게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태어났다.
여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뿐이다.

평일이라 영화관에 관객이 거의 없었는데 내 앞자리에 할아버지 두 분이 자리 잡고 계셨다. 참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한참 이어지던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자
"이제야 시작하네. 아이고 지겨워"
하시던 그분들은 영화 중간에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김지영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남성들보다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김지영들이 더 모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김지영들이 모든 82년생 김지영들을 손잡아 줘야 한다.
개인이 처한 환경과 개인이 겪는 고통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괜찮은 상황의 김지영이라도 나보다 더 힘들 수 있음을 모든 김지영이 이해해야 한다.
사람마다 감수성과 멘털의 강도가 다르더라도 우리는 모두 출산과 육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남성 위주의 사회를 거치고 있다. 
모든 세대의 김지영이 서로를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이 시대 김지영들의 눈물을 멈추게 할 키가 될 것이다.


                                                                    

그래도 김지영은 당차다.
 "가능하게 해야지"
대사 중 가장 맘에 드는 말이다.
김지영은 복직의 가능성 앞에 "가능하게 해야지"하며 희망에 찬다.
내가 언젠가 했던 말. 많은 김지영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해 보았을 말.

상황은 희망적이다.
영화의 결말처럼 82년생 김지영도 다른 김지영처럼 아이 잘 키우고 다시 사회생활 활기차게 하면서 나중에 92년생 김지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리를 할 수도 있다.
75년 김지영이 82년 김지영을, 82년 김지영이 92년 김지영을 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래도 이 사회가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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