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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Jan 10. 2020

고해성사

가족이라야 꼴랑 4명이 다인데 취향도 가지가지다.

그래도 억지로 분류를 하자면 아직 어린 둘째는 딱히 취향이랄 것이 없지만 엄마 껌딱지인 관계로 전반적으로 나를 닮았고 딸은 여러 가지로 저 아빠를 닮았다.


여행만 가지고 말하자면 나와 아들은 많이 걸으면서 구경하고 탐방하고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딸과 남편은 근사한 호텔에서 느긋하게 조식 먹고 해변에서 수영하고 썬배드에 누워 맥주(주스) 마시면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들이 무슨 광고모델이나 되는 줄 안다.


조금 못마땅해도 취향이니 그래 다 좋은데 여행 중에 꼭 딸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순간이 있다.

체크인이나 체크아웃할 때다.

내가 직원들에게 말하고 있으면 딸은 자리를 피하거나 심지어 옆에 서서 귀를 막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으니 답변이 어이가 없다.

"엄마는 저 사람들한테 무섭게 말해"

얘 좀 봐라? 그냥 체크아웃하는 건데 나를 완전 나쁜 사람 만드네? 억울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면 엄마는 말할 때 마치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 대하듯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약간 낮고 차분한 평소 자부심인 내 말투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는 건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그럼 어쩌라고? 원래 이런데. 발랄한 척 연극해??"

그 후로 나는 호텔 직원들을 대할 때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웃으면서 말하려고 하지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가급적 남편에게 맡기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딸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 한다.


말하는 것이 조금 무섭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다.

딸의 친구들도 너네 엄마 조금 무섭다고 하고, 어른들은 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으로 조금 어렵다고 한다.

-억울하니까 이쯤에서 나와 친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엔 조금 까다로운 사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허당이라고 반응한다는 것을 꼭 밝혀야겠다.-


40년 넘게 형성된 나의 이미지를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바꿔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이런 내가 싫지 않고 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이대로의 내가 좋았다.


내가 거만한 걸까?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멋진 척, 맞는 척하고 있는 걸까?

여러모로 남편을 닮은 이제 겨우 13살인 딸이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늘 못마땅해하고 참다 참다 결국 폭발하여 발광하듯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여러모로 딸과 닮은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나와 대학생들이 제일 들어가고 싶다는 회사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인데 부모님이 그런 남편에게 나처럼 잔소리를 해댔다면 그게 가능했을까?


"잘못되었다." 무언가 아주 천천히 스민다.


겨우 6개월 준비하고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덜컥 당선되는 욕심을 부리기도 했지만 당연히 미끄러졌다.

법륜스님식으로 말하자면 작년 공모전에 2500편이 넘게 들어왔다는데 그중에 꼴랑 10여 편 선발하는 프로젝트에 당선되는 게 당연하겠느냐? 떨어지는 게 당연하겠느냐?

떨어지는 게 당연하니 그리 아쉬울 이유는 없다.

왜 떨어졌을까? 특별한 이유를 찾을 것도 없이 그냥 부족해서 떨어졌다.

안쓰러워 차마 쳐다보지 못하던 내 글들을 이제야 찬찬히 다시 본다.


멋진 나, 반성하는 나, 너와는 다른 나, 이해하고 초월하고 포용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의연한 나

이게 정말 내 모습일까?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이것만이 내 모습일까?

글을 쓰는 순간은 진실이고 솔직했는데 이제와 보니 다 거짓말 같다.

내가 과연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조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사직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직원들이 뒤에서 팔자 좋다고 비웃던 말들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브런치북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내 자유의지로 새로운 삶을 위해서 사직을 선택했다고 그렇게 많은 글을 통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여전사처럼 살지 않고 애들도 어린데 살림하면서 글 쓰는 것이 어떤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조금 더 솔직하게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몸뚱이가 너무 힘들었고 이제 상급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을 좀 더 돌봐주고 싶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자존심 상했을까?

그래도 나는 항상 열심히 사는 사람이니까 집에 있어도 내 역할에 충실하면서 더불어 글도 부지런히 쓰다 보면 작가도 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을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한 듯 왜 그렇게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걸까?

돈이 안되어도 좋으니 정말 글을 쓰고 싶은 건 진심이었던 나를 속물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이 '불안(status anxiety)'에서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 나도 사회적인 관심에서 나가떨어지는 불안을 계속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직업을 그만둔 것이 사회적인 평가를 초월해서가 아니라 좀 더 쉬운 방식으로 다른 형태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교묘한 수를 쓴 건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란 복잡 미묘한 동물이라 꼭 한 가지 바로 그 이유만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해서 그렇게 결정 내렸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길게 말하면 변명 같으니까 이쯤에서 각설하자.



시간 날 때마다 스님의 법문을 들어도 실제 내 생활에는 제대로 적용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사십 넘어 무언가 터득한 것처럼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다.

늘 방어하면서 내 실체가 드러날까 봐 가면을 쓰고...

그렇게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갔는데 가슴을 울리는 글이 나올 리가 없잖아.

어쩌면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걸 당당히 드러낸 것이 아니라 괜히 접근하게 못하게 가면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깨의 힘은 어떻게 빼는 거지? 모르겠다.

어떻게 조금 더 솔직할 수 있는 거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 반나절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번뜩 드는 생각


어쩌면 내가 틀린지도 몰라.


은연중에 당연히 내가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예전에 남편과 딸이 놀리던 것처럼 나는 '답정너'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 뒤에 신경 쓰이는 완전히 반대의 가능성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것.

그런데 그 가능성이 늘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을 누르기 위해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아갔던 것.

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도 긴장이 풀어지서 온몸이 노곤 노곤해진다.


이 생각이 오늘 한 편의 글로 끝나지 않아야 할 텐데 요즘 자꾸 깜빡깜빡해서 걱정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되잖아.  

조금 더 유연해질 수 있잖아.


이 단순하고도 간단한 하나의 깨달음은 사실 내 생활을 완전히 분해하여 내 가족들에게 새로운 행복을 안겨줄 수 도 있다.

내가 틀리고 딸이 맞을 수도 있으니 딸에게 화내지 않아도 되고

내가 틀리고 아들이 맞을 수도 있으니 아들에게 짜증 내지 않을 수도 있겠다.

가족들이 나를 답정너(답은 정해졌고 너는 대답만 해)라고 놀렸던 것이 떠오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신경도 안 썼는데 나는 정말 답정너였던 거야.


오늘 글도 내가 이런 고해성사를 거쳐 결국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나아갔다고 포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 지 않기를 바라며 핸드폰 바탕화면에 한 문장 쓴다.


"내가 틀린지도 몰라. 힘 좀 빼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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