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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Apr 26. 2020

새로운 길에서 어릴 적 꿈과 조우하다

어느 여름 상상 일기

초등학생 때는 특별한 꿈이 없었다.

중학 때는 막연하게 기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 때도 기자나 아나운서같이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 내내 생활기록부의 진로희망란을 채웠던 기자 또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잡힐 듯 말 듯 꿈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가을, 방송국 아나운서 채용공고를 본다.

나는 망설였다. 그러나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지원한다.


입사지원서통과하고 학교 교정에서 친구가 찍어 준 셀프 프로필 사진도 운 좋게 통과했다.

카메라 테스트 1차, 2차, 3차를 통과했다.


카메라 테스트는 지원자들에게 5-6 개의 뉴스 기사 원고를 배부하고 사전에 30분 정도 연습할 시간을 준다.

어떤 기사는 숫자가  많고 어떤 기사는 수학 기호가 많고 어떤 기사는 외국지명이 많은 식으로  만만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카메라 테스트가 진행될수록 평가의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여러 개 조명이 뿜는 열기가 뜨거웠다.

아나운서처럼 단발로 자른 앞머리가 자꾸 흘러내려 쓸어 올리느라 무척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누가 봐도 방송아카데미 출신일 것 같은 외모의 지원자 몇 명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막연한 기대만 품고 아나운서 시험에 도전한 것 치고 자꾸만 테스트를 통과하니 덜컥 겁도 났다.

거 이러다 합격하는 거 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입 아나운서는 새벽 방송한다는데? 헛물켜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합격자 명단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편으로 아쉬웠고 한편으론 안도했다.

그렇게 최종 면접에 오르지 못하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나운서 시험은 막을 내린다.



막연한 기대와 어설픈 준비와 방송국의 높은 입장벽은 나의 현실을 깨닫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때라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졸업 전 취직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어떤 회사의 기획부서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그런데 그 회사 인사팀으로부터 혹시 비서실 근무를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비서라...' 호기심이 일었다. 당장 취직하면 부모님 좋아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해보겠다고 했다.

출근 첫날 비서실의 묵직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했다. 비서는 평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담당 임원이 호출하거나 무언가 지시하면 신속하고 정확하게 무를 처리해야 한다. 나는 회장 비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 신입에게 왜 회장님 비서씩이나 하라고 했는데 이해가 안 된다. 3개월 인턴기간이 끝난 후 정식 직원이 되는 계약이었다.

인턴 기간 쥐약이었다. 나는 조용한 임원실에 갇힌 마네킹 같다고 느꼈다.

당시 전례에도 없이 임원 비서실에 4년제 대학 졸업예정자를 뽑았고, 회사는 비서 교육, 매너교육 등 외부기관에 교육을 보내주었다. 나는 기존 비서들의 표적이 되었고 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소위 왕따였다. 인턴기간이 끝난 후 사표를 냈다. 내 인생 최초의 직장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왕 내 인생 투자해서 일하는 거 공익을 위해 일하자 했고 그래서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당시는 직장인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공무원이 상한가를 치던 때였다.

9급은 시시해 보이고, 5급은 어려워 보여서 선택한 것이 7급이었다.

2년 반의 시간을 투자하고 국가직 7급 공무원이 되었다.

제대로 된 직장생활이 시작되었고 부모님 밑에서 편하게만 살던 나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보게 다.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꽤 멋진 일이었다. 공무원으로 16년을 일했다. 그러다 40대 중반, 조직에 매여 쳇바퀴 돌듯 오가며 노인까지 일할 생각을 하니 공포스러웠다. 오랜 시간 고민했고 사직을 선택했다. 생애 처음 내 의지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진정한 자유를 깨닫는다.


삶은 때로 내 의지를 무시하고 세상의 의지대로 흘러가곤 한다. 살면서 나는 문득문득 궁금했다.

만약 나도 방송아카데미를 다녔더라면,

만약 나도 미용실에 가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스프레이를 잔뜩 뿌렸더라면,

만약 나에게 주어진 30분 동안 다른 지원자들 훔쳐보지 않고 발음 연습에 충실했다면,

만약 누군가와 나의 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화하면서 막연한 기대를 넘어 방송인이 되기 위한 세밀하고 치밀한 준비를 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정말 아나운서가 되었다면 비서실에서 인턴기간 동안 왕따를 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공직에서 숨 막혀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올해 봄 전 세계를 강타한 바이러스 사태로 집에 갇힌 지 세 달이 되어간다.

집에만 있으니 평소라면 불청객이었을 이들도 반가울 지경이었다.

'드르륵드르륵' 핸드폰이 열린다. 02로 시작하는 일반전화다.

아무래도 학원 홍보하는 전화 같다. 도대체 내 전화번호가 어디에서 샜는데 학원 홍보 전화가 오곤 한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저 초등학생 없는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중고생을 대상으로 수학을 전문적으로...?" "저 결혼 안 했어요."

몇 번 하다 보니 그런 거짓말을 시치미 뚝 떼고 하는 내가 재미있기도 하고 또 이번엔 어느 학원인가 2% 궁금하기도 하여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도리 작가님이시죠?"

"네?... 네에" 뭐지?

"'나는 작가다' 공모전 당선작으로 최종 당선되어 전화드렸습니다."

"네?... 네..... 네네... 네.."

나는 '네'만 몇 번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살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이벤트 중 하나였을 그 사건은 내 삶이 이미 새롭게 시작했음을 알려주었다.


오늘은 방송 전 내 글을 녹음하는 날이다. 얼굴이 나가는 것도 아닌 데 한껏 차려입은 내 모습이 우습다.

잔뜩 긴장하고 평소보다 더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관계자가 다가온다.

이것저것 안내를 하고 금방 끝나니 긴장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어딘가로 간다.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본다. 그리고 복도에서 사라진 후에야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어쩌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이 곳. 어쩌면 저 친절한 역할이 내 몫이었을 이 곳.

만약 내가 방송아카데미를 다니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고, 다른 지원자들 훔쳐보지 않고 원고 읽기에만 충실했다면, 어쩌면 내 삶의 터전이 되었을 이 곳 방송국에 오늘 나는 방문객으로 앉아 있다.


1인 녹음실인가? 내부가 좁다.

방음장치로 원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불안할 만큼 크게 들린다. 나는 긴장하며 큐 사인 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사인등이 켜지고 나는 내 글을 읽기 시작한다. 한 단락 으니 처음의 긴장감은 사라졌다. 평소 실전에 강한 면모가 드러난다. 중간중간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울컥 슬퍼지려고도 한다.

오케이 신호를 보고 다시 사인등이 꺼진 후 밖으로 나온다. 금방 끝난다고 했는데 왜 이리 시간이 흐른 것 같을까? 했는데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만났다. 작가로 가는 새로운 길에서 나는 그렇게 어릴 적 꿈과 조우했다.

내 어릴 적 막연한 꿈의 자리는 20년 훌쩍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당시 어설픈 입사지원생을 맞이했다.

비공식적으로 작가였던 내가 공식적으로 작가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날, 내 어릴 적 꿈은 그렇게 조용히 다가와 나를 응원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을 그리고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글을.


2020년 어느 더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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