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소강 Jun 10. 2020

'괜찮아 보이려는' 페미니즘

여성학에 대한 고민과 단상들, 그리고 <레이디 맥베스>

몇 년 전, 여성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브런치에 글을 썼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삶을 보고 자라며, 동시에 그들에게 가부장적 여성성을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으면서 자라온 나. 과연 나는 어떤 여성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담아 썼던 글.


그 글을 썼던 때보다 사회는 더 많이 변했고 나 역시 그랬다. 사회든 나든, 좋은 쪽과 나쁜 쪽이 적절히 뒤섞이며 변해온 듯하다. 지금의 나는 페미니즘을 넘어(혹은 너머) 동물권과 환경권에 대해 고민 중이다. 지난한 우울을 통과하며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또 다른 강요가 무서워서 뒷걸음질 쳤다고 할까. 지배-피지배로 구성된 위계질서와 권력구조(젠더 계급)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합의점을 도출하며 조화롭게 풀어가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던 것이 나의 페미니즘 사고였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같더라도 사람마다 이를 행하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자신의 방식을 앞세워 주장하는 순간, 차이는 강요가 되고 목표는 무너진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의 사고방식은 패배주의이자 순응주의였고, 편한 것만 취하며 '괜찮아 보이려는' 페미니즘이었다. 치열함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공부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여전히 이해해보려고 노력 중이지만 선뜻 나서기가 두렵다. 골이 너무 깊어진 젠더 갈등과 그 갈등에서 빚어지는 분노들이 감당하기가 어렵다.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는 입장이다. 어떤 이가 나의 입장과 자세를 불편해할까 봐, 혹은 무시할까 봐, 그래서 더 갈등이 조장될까 봐 두려워서 말을 꺼내기 어렵다. 그래서 서서히 피해왔던 것 같다. 요즘은 젠더 권력구조 자체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인지, 아니면 젠더 권력을 쟁취하려는 게 목표인지 모르겠다.



레이디 맥베스

얼마전,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봤는데 아주 간략히 말하면 욕망에 휩싸인 여성, '캐서린'의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비윤리적 행동도 서슴지 않는데, 거기에는 살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받던 캐서린이 욕망을 져버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지만 욕망이 윤리보다 앞서는 지점에서는 사실 동의하기 어려웠다. 영화는 원작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지향점이 명확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질문도 던지고 있다. 캐서린이 자신을 억압하던 남성들을 차례로 해치우며 젠더 권력구조를 무너뜨렸다고 해도, 결국 죄가 드러날 지경에 처했을 때는 하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며 '지주'라는 지배계급으로서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여성도 욕망을 앞세울 수 있는 존재이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동물이든 사람이든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기존에는 그런 캐릭터성이 남성에게는 당연시 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나, 결말에서는 욕망이나 권력 추구의 단면이 어쩌면 '괜찮아 보이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페미니즘의 지점에 머무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가 억압/권력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페미지즘 지향의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까지 캐서린을 옹호하지 않는다. 


이렇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진취적인 입장 역시 '괜찮아 보이는 페미니즘'이 되는 것이다.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인지, 아니면 권력을 쟁취하려는 게 목표인지에 따라.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페미니즘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나 스스로도 기준에 확신이 없어지고 있던 찰나, 좋은 기사 하나를 만났다. 페미니즘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기사로, 지금까지 내가 옳은 기준을 취한 것인지, 내 기준과 그에 따른 판단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좀 더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떤 가치에 대해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판단은 기준에서 비롯되었을 뿐 늘 정답은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 여러 기준의 스펙트럼을 체득하게 되면 스스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뿐이다.



<지금 페미니즘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하미나 (페미당당 활동가), 시사인 629호(19.10.11) 기사전문

활동가로 지내면서 부딪힌 가장 큰 의아함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나는 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다른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세상을 다르게 보는가. 어째서 계급에 관한 문제 제기는 정치적 올바름, 동물권, 환경권에 관한 이슈만큼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하는가. 똑똑하고 인권 의식도 탁월한 친구들이 왜 가난하고 촌스러운 여자들과 도저히 섞이려 들지 않는가.
(…)
또 다른 의아함은 나를 향했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보수적이었을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주류가 되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소속으로 판단하며, 성취에 그토록 목맸을까.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는 줄곧 돈을 벌고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었지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나 공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시장의 여자들은 내가 이곳에서 어서 탈출하기를 원했지, 이 게임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불리한지를 말하지 않았다. 

최근 SNS에서는 여성들이 더 돈을 모으고, 더 좋은 직업을 갖자는 이른바 ‘야망 플로’가 일었다. 상위 몇 퍼센트 남자가 누리던 세계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나도 들어가겠다는 운동이다.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간신히 그 세계에 편입한 여성의 이야기는 가난한 여성의 목소리를 더더욱 가릴 것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과 같은 계급이면서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남성일 테니까.

페미니즘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다시 묻는다. 이 운동이 이미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도덕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