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와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는
독서모임으로 도서 선정되어 산 책이자,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로 새로 발간된 책이다. (책 디자인도 표지도 예쁘고 취지도 좋고, 요새 참 마케팅 잘하는 민음사)
정미경 소설가의 작품은 처음인데 확실히 요즘 문체와는 다른 느낌이라, 뭐랄까 좀 무게 있게 읽혔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 단편소설은 뭉근한 질감의 낮은 채도의 색이 느껴지는데,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소설들은 모두 묵직한 무게의 짙은 붉은, 핏빛의 느낌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은 모두 고통을 안고 생을 견뎌내거나 고통을 통과하는 중에 있다. 그 와중에 문체는 어찌나 건조한지. 그러나 적어도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고 가면서도 삶에 버티고 서 있다. 죽을 듯한 고통과 삶이 사이. 핏빛은 생명(생기)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소설집에서 핏빛을 읽어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표제작보다는 <호텔 유로, 1203>였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시종 마음에 들었다. 소설 배경은 2000년대이지만 2020년 작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 인간은 소비로 존재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여자는 초라한 현실과 화려한 이상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물건을 구매하고 결국에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를 상품화한다. 연신 '괜찮아'를 주문처럼 되뇌며, 상품으로서의 자신을 치장한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았어도 남은 것은 관절염뿐인 엄마의 초라한 삶과 젊고 아름다운 탤런트 '윤미예'의 삶. 여자는 그 가운데서 그녀는 자신의 초라하고 열등한 존재를 잊기 위해 소비를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소비되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환상은 여전히 유혹적이다. 그러나 단지 소비만으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여자도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그 유혹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내기 어려운 여자의 미련을, 그렇게 해서라도 주변이 아닌 한가운데에 존재하고픈 욕망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미련과 욕망만 남은 여자의 텅 빈 영혼이 안쓰러웠다.
"일생 동안 열등감 따위는 느껴 본 적이 없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 '유로 호텔'도 아닌 '호텔 유로'로 향하는 여자. 이 도시에서 열등한 존재라는 느낌을 지워줄 무언가를 그는 줄 수 있을 것이라 여자는 확신한다. 호텔 복도에서 1203호의 초인종이 울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텅 빈 복도에 외롭게 울렸을 초인종 소리 앞에서 여자가 다시 한번 '괜찮아'를 곱씹고 있을 것 같아서 쓸쓸했다. 부디 언젠가는 열등감을 지워줄 구원자가 스스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캐릭터성 때문에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가 가장 생생하게 느껴진 작품이었다. '정은'은 결혼 전 잠깐 지낼 생각으로 시장 골목집에 이사를 오는데 사적인 영역을 자꾸만 침범하는 이웃들에 불편함을 느낀다. 연신 '누굴 탓해'라며 자책하며 체념하던 정은이지만,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밝게 웃는 이웃 '미옥'과 골목집 사람들의 일상을 영화로 담는 청년 '승우'에게 마음을 열며 골목집 생활에 스며든다. 그러나 미옥이 살해당하고, 정은과 승우는 그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짓눌린다. 그 사건 이후 정은은 골목집을 떠나고 승우와 정은이 골목집에서 서로를 조심스레 비추던 희미한 빛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승우가 카메라에 담던 골목집의 소소한 풍경과 훈훈한 공기는, 우발적인 살인으로 무자비하고 차갑게 느닷없이 바뀌어 버린다. 죽음은 일상의 경계로 예고도 없이 들어와 인물들의 삶을 흔든다. 그래, 삶에 개연성은 없겠지만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의 결말을 마주했을 때는 허무하면서도 괜히 걱정스러웠다. 소설 속 인물들을 향한 애정이 담뿍 느껴지다가도 매몰차고 냉정하게 제 갈길을 가게 하다니,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나도 마음이 쓰여서.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정미경 작가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2017년에 별세했다. 생전에 그는 작품 활동을 활발히 시작한 2000년 무렵부터 반지하 원룸을 빌려 거기서만 글을 썼다고 한다. 남편의 추모 산문을 보면 그가 어떻게 작품을 써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천천히 아껴서 찾아 읽어보려 한다.
"발병 한 달, 입원 사흘 만의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이 일은 흡사 천둥벼락 치듯 일어났다. 그녀는 절망적 병을 선고받고도 침착했다. (...) 그녀가 떠난 짐 정리를 위해 그 반지하 방을 열고 들어가니 벽에 붙어 있는 쪽지들이 보였다.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나를 파괴한다'
그렇게 벽에 붙어 있는 무수한 쪽지들이 내게는 흡사 사방에 튄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전장도 그런 전장이 없었다."
_ 김병종 화백 추모 산문 <나의 피투성이 연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