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반려일기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이유는 왠지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영감은 아니어도 작은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마음을 닫아버렸다. 좋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지만 때때로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어쩌면 침묵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힘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우리는 언제고 날이 서있다. 휘두를 때만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에 지쳐갈 때 즈음, 반려식물을 하나 들였다. 이름은 제임스. 이 식물을 들일 때 보던 영화 주인공들 이름이 대부분 제임스였다. 아마 가장 주요했던 이유는 울버린의 본명이 제임스여서. 제임스는 '죽백나무'였고 창문 만은 컸던 원룸 창가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얼마 후 이사를 했고, 제임스도 함께 옮겨 왔다. (오랜 장마를 겪으면서 제임스도 가지를 쳐내야 했지만 잘 이겨냈다.)
남편과 식물을 하나 둘 들이면서 어느덧 서른 개가 넘었다. 개 중에 몇 친구는 장마를 못 이겼고, 겨울을 못 이겨냈다. 지금은 서른 개의 식물들과 공생 중이다. 품종은 총 스물여섯 개. 우리 집에 온 식물 친구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러준다. 식물들은 때가 되면 새 잎과 꽃을 틔우고 가장 오래된 잎은 노랗게 변하며 진다. 그들은 말없이 조용하게 자라나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제 몸에 필요한 온도와 자라는 순서를 스스로 알고 있어서, 나는 필요한 때에 적당량의 물을 주고 충분한 햇볕을 쬐도록 해주며 공기를 순환해준다. 그리고 가끔씩 잎 정리와 분갈이를 해줄 뿐. 식물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그뿐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개와 함께 한 나로서는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익히 알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까지. 나와 남편은 반려동물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아직은 물리적인 면에서 반려동물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반려동물이 이 정도인데, 반려인이라면 어떨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인격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과는 함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반려견의 성격 문제도 보호자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을. 사람은 오죽할까.
그런데 지난가을, 내게 새로운 반려인이 찾아왔다.
생각지 못한 소식이었다. 일 센티미터도 되지 않은 작은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도 내 몸속에서.
친구들의 임신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온 마음으로 축하해주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임신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했다. 늘 결론은 같았지. 나였다면 두려웠을 거야. 두려움의 이유는 늘 같았다. 부모라는 이름의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내가 둘 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내가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시니컬한 나와 달리 남편은 선한 낙천가라는 점이다. 내 성격이 고약한 늙은 고양이 같다면 남편은 순한 골든 리트리버 같은 성격이다. 내 오랜 우울감도 그를 만나고 많이 치유되었다. 두려움에 휩싸여 온갖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남편은 부정적인 생각의 꼬리를 끊어주었다. 그와 함께하면 지독하게 우울한 일상도 신명 나는 생활이 된다. 내가 신명 난다는 말을 할 줄도 알게 된 것이다.
네가 내 성격 중에 하나를 꼭 닮아야 한다면 나 아닌 다른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것, 자연을 사랑하는 것, 그 마음만 닮았으면 좋겠다. 꼭 닮지 않았으면 하는 건,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스스로를 온 힘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