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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Jul 11. 2017

옥자와 나

동물과 연대할 수 있는 인간의 생활. 최소한의 예의 지키기.

고대 시네마트랩에서 <옥자>를 봤다. 내가 고민하던 일정에 봉감독님 무대인사가 있다고 해서 냉큼 예매를 했다.

나는 유독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에 약하다. 말 못하는 동물이 이유 없이 학대를 받거나 혹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들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내 삶의 절반을 반려동물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단순히 동물로만 보기가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개, 고양이, 병아리 등 여러 반려동물들을 키워왔고 우리집 개, '랖'이는 어느덧 우리집에 온 지 햇수로 14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와 눈빛과 온기로 교감해온 동물들은 동물 그 이상의 존재였다. 내 몸짓과 목소리와 눈빛과 체온에서 나를 읽고 대할 줄 알았으니까. 내가 동물이야기에 유독 약한 것은 바로 그 교감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만화에서 말못하는 동물들은 주인과 친구를 위해 어떤 생각을 할지 대충 알 것 같아서. 그 순수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슈퍼돼지 옥자와 평생 함께 해온 '미자'에게 옥자는 단순히 가축일 수가 없다. 친구이고 가족이며 교감하는 대상이다. 함께 잠을 자고 산책을 가고 귓속말을 주고 받는 장면은 미자와 옥자가 서로를 주인-가축 관계가 아닌 동등한 친구-자매로 여기고 있음 알 수 있다. 내가 우리 랖이와 함께 자고 산책을 가고 귓속말을 주고 받는 것처럼 미자에게 옥자는 반려동물이자 친구였다.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옥자를 동물이 아닌 미자의 여동생이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상황이다. 나한테서 랖이를 빼앗아 간다면? 빼앗간 사람들이 랖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 나도 미자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복날을 앞두고 지난 9일에는 시청 앞에서 개 식용 반대 집회가 크게 열렸다. 개 식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많지만 인간을 위해 영문도 모르고 희생 '당하는'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행위는 문화로 존중받을 수 없다. 생명을 경시하는 인간들은 그 자신의 생명도 존중받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영화 <옥자>를 보고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무작정 채식만 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옥자> 공식포스터


영화를 보고나서 옥자 특집이 실린 한겨레21을 읽다가 '여성 돼지'를 다룬 기사를 보고 또 한바탕 울었다.


농장 말고 공장, 즉 일반적인 양돈농장에서 살아가는 돼지들의 삶은 어떨까? 암퇘지들은 스톨(감금틀)에 한 마리씩 갇혀 살아간다. 수컷 중 소수는 정자 공급용 씨돼지로 별도 관리되고, 나머지는 모두 ‘비육돈’, 즉 살찌울 목적으로 사육된다. 새끼돼지는 태어나 겨우 3∼4주 만에 어미로부터 분리된다. 암퇘지는 스톨에 갇힌 채, 수퇘지 정액이 든 튜브가 생식기에 꽂혀 인공수정이 된다. 그리고 출산한 새끼 수에 따라 ‘성적’이 매겨진다. 성적이 좋지 않은 어미돼지는 도축된다.

옥자가 수퇘지에게 강제로 교미당하는데, 실제 축산공장의 암퇘지들도 자의와 상관없이 임신된다. 전 지구에서 가장 고통받는 생명체는 공장식 축산에서 사육되는 돼지·닭·소, 그중에서도 ‘여성 동물’이다. 그들은 감금틀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인공수정으로 강제 임신되고, 출산 뒤 충분히 돌볼 기회도 없이 3∼4주 만에 새끼를 빼앗기고 또다시 임신을 당해야 하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맴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선 후보가 과거 여성에게 돼지발정제를 먹이려는 계획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많은 시민이 경악했다.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인데, 이런 일을 ‘여성 돼지’들은 일상적으로 당하며 산다.

영화감독 황윤, <돼지발정제와 '여성 돼지'>, 한겨레21, 제1168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43768.html)


여기엔 풀어야할 실타래가 너무 많다. 지금 여러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얼키고 설켜 있어서 개개인조차도 개 식용이나 도축, 축산업자나 동물의 권리 대한 가치판단이 명확하지 않은 지경이다. 실타래의 한 쪽 끝을 잡고 천천히 풀어보았으면 좋겠다. 그 실 한가닥은 욕심이 아니라 공존이다.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저 우주먼지만 한, 동물과 다를바 없는 생명체일 뿐인데 우리는 마치 위계관계가 있는 것처럼 동물을 다루고 있다. 고작 지능이 좀 더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외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우러나오는 '공존'이란 가치이다. 동물과 인간이 다를 바 없다는 그 경외감이 있다면 가축, 반려동물, 나아가 벌레 한 마리라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피치 못할 상황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동물자유연대 공식사이트와 블로그를 종종 들어가서 보호소에 새로 온 친구들의 얼굴도 보고 할 수 있는 만큼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자원봉사는 매번 일찍 마감이 되어 신청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더 많이 모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힘이나고 뭉클하다.


유난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생활 속에서도 꼭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있다. 최소한의 예의 지키기. 내가 인간이자 포식자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기. 계란을 먹을 때도 좁은 닭장 속에 갇혀 계란만 낳았을 닭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하물며 모기를 죽이고 나서도 다음 생을 위해 기도해준다. 모순일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은 나름의 노력들이다.


- 자연과 동물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보다 고차원의 의미(사실 이것은 원시적인 차원)를 바라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다.

- 생활에서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기. 난 우주에서 먼지같은 존재일뿐이라는 사실 잊지 않기.

- 빛이 들이치지 않는 그늘에 관심을 갖기. 빛이 있다면 그늘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기.


내가 백석 시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동물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을 바라봤다기 보다 동등한 위치에 두고 바라본다. 그 시선에 크게 공감하여 그의 시 속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을 찾아 소논문을 쓴 적도 있다. 만나뵌 적은 없지만 그는 생명과 자연을 사랑한 무척 따뜻한 분이었을 것이다.


시 두 편의 일부를 실으며 글을 마친다. 많은 이들이 전문을 꼭 읽어봤으면 싶다.

다산책방에서 출판된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실린 시, <수라>와 <선우사-함주시초4>이다.



#덧.

옥자야, 행복해. 내가 너에게 하는 귓속말은 이거야.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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