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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Jul 09. 2017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

맑게 정제된 케말의 사랑, 박물관에 전시한다

2분 30초 데우면 완성되는 사랑

외적인 유행도 내적인 가치관도 빠르게 변하는 요즘은 인테리어도 음식도 간편하고 편리하고 것들이 인기를 얻는다. 요즘 사랑도 그러해서 마치 자판기처럼 원하는 배경을 가진 연인을 골라서 만나고 빠르게 취해서 아니다 싶으면 다른 사랑을 찾는 인스턴트식의 사랑이 만연해 있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랑은 촛불보다는 불꽃 같아서 전자렌지에 2분 30초만 데우면 바로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 같다. 즉 ‘실용성’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사랑 방식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 ‘요즘 사랑’의 굴레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신세니까.

그런 요즈음에 만난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순수 박물관>은 그야말로 스며든 물이 흙을 거쳐 불순물을 거르고 거른 맑은 샘물 같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 사랑이라 함은 요즘 시대에는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순애보’ 그 자체였다. 한 여자를 사랑해서 자신의 생활을 모두 져버리고 평생동안 그 사랑을 위해 산 한 남자의 이야기. 감히 한 문장으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렇게 쓸 수 있겠지만 <순수 박물관>에는 한 문장안에 담을 수 없는 깊이와 세월의 사랑이 있다. 

케말의 삶은 퓌순을 만나고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상류사회에 속했다면 무릇 그래야하는 집안끼리의 결혼을 망쳐버렸고 퓌순의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는 그녀의 손길이 스쳤던 모든 물건을 수집하고 그 물건들을 쓰다듬으며 위안을 받는다. 그 물건들로 채워진 박물관에 살면서 케말은 영원히 퓌순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덕후의 사랑

<순수 박물관>을 읽던 즈음 TV음악방송에서 아이돌 연습생들을 국민투표로 뽑는 프로그램이 화제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만나면 온통 그 프로그램 이야기만 했는데 우리의 만남을 돌이켜 보니 그 친구들과는 항상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해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는 아이돌가수에 일상을 바쳤던 이력이 있는 소위 ‘덕후’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라는 말이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쓰이고 있듯, 우리는 휴덕은 했을지언정 한번도 탈덕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덕후들에게는 덕DNA가 있다는 다소 황당한 결론에 도달했지만 어쩐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는 능력에도 사람마다 에너지 차이가 있을 텐데 덕후들, 특히 아이돌을 사랑하는 덕후들은 그 에너지가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많은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인 덕후의 주장일 뿐이지만. 사랑은 오감이 모두 충족되지 않아도 (직접 만나 사랑을 나눌 수는 없으니까) 균등한 양방향이 아니어도(내 사랑을 그를 향하지만 그의 사랑은 모든 팬들을 향한다) 순수하게 형성될 수 있다. 가끔 지나친 사랑이 ‘사생팬’을 낳기도 하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반작용이라고 구분해두자.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감정이면서 누구나 쉽게 누릴 수는 없는 감정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에게 저마다 다른 형태를 갖는다. 어느정도 범주는 분류되겠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에게 실망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등을 돌려버리는 팬들도 있다. 아이돌로서의 직업의식, 사회적으로 갖는 ‘우상’으로서의 역할들에 반한 일을 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의견을 가진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아이돌의 연애는 절대적으로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고 한다. 반면, 아이돌도 사람이니까 연애든 사랑이든 마음껏 해야하며 그들이 사랑을 해서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다. 같은 덕후/팬이어도 대상에 대한 태도에 차이가 난다. 

케말은 퓌순의 행방이 묘연해진 후 일상을 모두 망쳐버릴 만큼 괴로움에 사로잡혀 지냈고, 마치 그를 살려주듯 몇 년만에 퓌순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퓌순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케말은 이에 대해 어떤 반발심도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케말은 퓌순을 향한 사랑을 접은 적이 없듯 앞으로도 접을 수가 없었으니, 결혼한 퓌순과 그녀의 부모님,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까지 함께 TV를 보며 무려 8년을 보냈다. 그는 그 집에서 퓌순의 물건들을 조금씩 수집하기 시작하고 퓌순을 만나지 못할 때는 그 물건에서 퓌순을 느꼈다. 식탁에서 퓌순이 피웠던 담배꽁초를 모두 수집하고 그 꽁초의 구겨진 모양에서 그녀의 기분을 읽을 정도로 케말의 퓌순을 향한 사랑은 지독하리 만큼 깊다.

요즘말로 하면 케말은 ‘지독한 덕후’로 분류될 것이다. 그러나 덕후가 어느정도 인정 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아이돌 덕후는 물론 어떤 것에 깊이 빠진 사람은 ‘괴짜’로 사회적 낙인(‘괴짜’에 담긴 뉘앙스가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이 찍힐까봐 덕력을 조금 희석해서 오픈하거나 절대 오픈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곳에서 위안을 받는다. 오죽하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나 ‘덕밍아웃(덕후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란 말이 있을까.


케말이 퓌순의 물건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수집가들을 찾아다닌 대목을 보면, 수집가들이 얼마나 수면 아래 숨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괴짜로 치부하기 때문에 자기들만의 협회를 만들고 거기서만 연대한다. ‘수집’이란 행위에 담긴 깊은 애정을 케말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대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퓌순과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녁시간을 함께 했던 그 집에 ‘순수 박물관’을 세우고 그 건물 윗방에 살면서 케말은 비로소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더이상 퓌순을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황을 그가 이렇게 극복한 것은 독자 입장에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관람객이 퓌순을 느끼고 퓌순이 존재했던 그 시간을 느낌으로써 케말의 퓌순은 영원히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케말은 사랑의 고통과 극복을 통해서 정말로 정제된 순수한 사랑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정말로 고차원의 사랑이다. 흙탕물이 자연히 맑은 샘물이 될 때까지 오랜 시간 정제되는 것처럼 ‘실용’이나 ‘편리’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작용이다.


비로소 행복

인간이 한 인간을 사랑할 때 어느정도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1970년대의 케말과 2010년대의 덕후를 비교해서 써보고 싶었다.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누군가의 말을 조금만 틀어보면 곧 사랑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인스턴트 사랑말고 꾸준하고 성실하며 정제된 사랑 말이다. <순수 박물관>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행복’이다. 비로소 행복을 찾은 케말에게 존경을. 이 소설과 영화 <베스트 오퍼>를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사랑의 영향력과 그 영향력 아래 무너졌다가 극복했다가 비로소 행복을 찾는 인간의 모습이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 덧1

<순수 박물관>에서 그리는 1970~1980년대의 이스탄불의 보수적인 면이나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미룬다. 터키가 우리나라만큼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것은 많이들 아는 사실이니까. 여성은 소유물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보고 있자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사실 케말이 약혼녀였던 시벨에게 한 행동은 비겁했다. 그도 알고 있었지만은.


# 덧2

사랑에 아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케말의 ‘고통의 시간’에 공감할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던데 그는 사랑의 고통에 오래 앓아봤음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흔적 하나에 일상이 암전이었다가 천국이었다가를 오가는 그 시기를 너무도 통렬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그리고 있다.


# 덧3 

<순수 박물관>에 계속 등장하는 그 음료! 멜템 사이다를 마셔보고 싶다. 


# 덧4

이 감정을 남겨 놓기 위해 이 글을 여기에 전시한다. "~전시한다." 라는 어미를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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