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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Apr 23. 2017

누구에게나 로빈은 있다

사랑을 음악처럼 음소거 하면, 들리진 않아도 연주되거든요, 음악처럼




누구에게나 '로빈'이 있다 - 너무도 사랑하지만 이어질 수 없는 사람. 다른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든 그와 함께하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사람. 출처:9gag


<How I met your mother>, 테드와 나의 이십대, 이십대.


미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How I met your mother>은 나에게 언제나 특별한 '미드'다. 독일에서 외롭게 지낼 때 집에 돌아와 매일 한 두편씩 에피소드를 보다 보니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감정이 생겼던 시트콤. 심지어 유럽 여행을 혼자 다닐 때도 이 시트콤을 보고 잠들면 외롭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매년 새 시즌을 챙겨보며 같이 자란 친구 같은 주인공들. 시즌1에서의 주인공 '테드'와 내가 같은 나이가 되어서야 시즌은 끝이 났지만, 그만큼 나는 시즌9까지 지속된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꽤 많은 간접 경험을 했다. 특히 서툴고 찌질하고 질척대는 사랑, 국경을 막론하고 유효한 인간의 통속적인 감정들도.


'HIMYM'는 테드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엄마를 만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시작하는데, 1화에서 테드는 ‘로빈’을 처음 만나고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그게 바로 엄마와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테드는 상대가 '로빈'임을 밝히고 아이들은 깜짝 놀란다. "뭐요? 로빈 '이모'요?"


그 후 10년 가까이 로빈과 친구로 지내면서 한 번은 마음이 맞아 사귀었다가 두 사람이 그리는 미래의 결혼상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기도 한다. (테드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길 꿈꾸지만 로빈은 결혼보다는 커리어가 먼저다) 그 후 테드는 몇몇 여자를 만났지만 번번히 실패하는데, 그 이별 중 몇 번은 로빈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테드는 로빈을 결코 잊지 못한다. 차라리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여자친구와 로빈이 동시에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테드는 ‘친구니까’를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로빈에게 향한다. 그의 진정한 마음은 이미 처음부터, 그러니까 1화부터 정해져 있었다.


상심에 빠진 로빈을 위해 달려와 준 테드


테드와 로빈은 서로 연애사를 상담해주기도 하고 헤어진 후에도 플랫메이트로 지내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테드와 로빈이 ‘백업 와이프-허즈밴드’가 되는 장면이다. 테드가 여자친구와 즐기기 위해 준비해 놓은 근사한 저녁식사 이벤트를 결국 로빈과 보내게 되면서, 테드는 말한다.


우리가 마흔이 되었을 때까지도 혼자라면, 그때는 우리 결혼하지 않을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굿 바이, 내 베스트프렌드 마이클'


줄스와 마이클은, 스물 여덟살까지 혼자라면 결혼하지 않겠냐는 피의 서약을 나눈 사이다. 어쨌든 피를 내어 손을 맞잡았으니 따지고 보면 피의 서약이지만, 대학교 때 한 달 정도 사귀었다가 헤어진 후 친구로 남기로 한 두사람이 투칸으로 여행을 갔다가 비장하게 나눈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스물 여덟살을 석 달 앞두고 줄스는, 느닷없이 마이클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그동안 진지하게 만난 여자도 없던 마이클이 갑자기 결혼이라니.


9년을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 온 줄스와 마이클. 졸업 이후에도 각자의 연애상담도 해준 사이지만 다른 사람과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지도 않았고, 결국은 서로에게 기댔던 두사람이었다. 마이클에게서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가 혹시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건 아닐지 내심 행복한 불안과 설렘이 섞인 기대를 한 줄스 입장에서 마이클의 결혼은 일단 낯선 충격. 그리고 이번주 일요일에 식을 진행한다는 그야말로 '느닷없는' 소식에 줄스는 그동안 그에 대해 외면했던 자신의 감정들의 비겁함과 숨겨왔던 알량한 질투심까지 한번에 마주보게 되어버린 것이다. 쉽게 실증내고 까탈스러운, 그러나 독립적인 그녀가 결국 "9년 간 나만 바라보던 마이클이?" 하는 말까지 새어나와 버린 것.

줄스는 마이클의 약혼자인 '' 만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9 동안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진지한 관계가 겁이 나서 피하기만 했었던 사실을 마주한다. 없는  미뤄왔던 숙제를 마주하게 된 줄스의 비겁함. 그에 비해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거침없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자신을 언니처럼 따르는 마이클의 약혼녀 .


줄스는 마이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버리지만, 끝내는 마음을 접기로 하고 두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준다. 마이클이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줄스는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마이클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몰려드는 하객들에 그만 밀려나고 만다.


돌아서는 줄스에게 마이클이 휙 다가와 포옹하며, ‘굿 바이’라고 속삭이는데 그 마지막 결말이 그렇게 씁쓸하고 아릴 수가 없다. ‘굿 바이’는 9년 간의 미뤄두었던 두 사람의 진심과 미련에 고하는 작별이었다.



맺어지지 못하는(않는) 남녀의 복잡미묘한 감정.

테드와 로빈은, 줄스와 마이클은 우정이 소중하다는 핑계로 감정을 회피했다.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곁에 영원히 두고 싶어 했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으니까.


사랑의 감정은 볼륨 버튼처럼 이리저리 강약 조절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정지 버튼도, 음소거 버튼도 없는 걸(음소거를 해도 음악은 재생된다). 익숙하고 감미로운 음악을 끄고 싶지는 않고, 가끔은 크게도 듣고 싶은데 그 음악이 끝나는 게 두려워서 또 다른 음악을 휘적여 보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은 가장 조용히 틀어 두고서.


시대가 지나도 여전히 철이 없는 ‘사랑에 빠진 인간’.

시대가 지나도 낡지 않는 감정.

이 포스트모더니즘스러운 감정처리는

누군가에는 신랄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쓴 공감을 나눠준다. 여전히 철 없는, 사랑에 빠진 인간.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이고 그에 휘둘리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더이상 휘둘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정지 버튼을 누르기로 결심하는 것도 인간.


사실 쿨한 사이는 없거든. 음소거를 하고 있을 뿐이지, 마치 정지한 척을 하고 있을 뿐. 재생은 된단 말야 음악이란 게.


영원히 꺼버릴 수는 없다. 가끔씩 오래된 음악을 들어보며 한창 그 음악을 듣던 때를 떠올리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산이다. 모든 추억이 영혼의 재산이 되듯.


테드와 로빈은 결국 다시 만났고, 줄스와 마이클은 글쎄, 계속 친구로 지냈겠지만 두 사람만의 음악을 영원히 삭제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내 20대를 결코 삭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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