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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Feb 14. 2018

삼십 대엔 더 혹독한 여성 프레임, 영드 <미란다>

영국 시트콤 <미란다>, 삼십 대엔 더 혹독한 여성 프레임


What I call, Miranda

영국 시트콤 <미란다>

이번엔 삼십 대. 삼십 대엔 더 혹독한 여성 프레임



*

<미란다>를 봤다면 'What I call'이란 말을 한번쯤 말해 보게 된다. 

교양 넘치는 척하는 유쾌한 미란다 엄마의 말투. '내 식으로 말하자면' 정도의 뜻이다.

*



#노처녀 라는 해시태그


우선 밝히자면, 영화 평가 앱으로 시작한 왓챠의 오래된 유저이자 왓챠플레이 출시 시점부터 꾸준히 정기결제로 사용해오고 있는 헤비유저이다. 왓챠플레이를 써 오면서 새로 접하게 된 콘텐츠도 많다. 영국 TV 드라마 <미란다>도 그중 하나. 

왓챠플레이는 콘텐츠마다 내외부적인 특징에 대한 해시태그를 달아 놓고 그것을 카테고리로 묶어 콘텐츠를 범주화한다. 카테고리는 매우 세부적이고 방대한 편이다. (페미니즘, 동성애, 변태, 마녀, OVA, 청춘, 소설가, 영국배경, 픽사 등등) 정교한 큐레이션을 위한 작업 같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미란다>에는 #노처녀라는 해시태그가 달려있다. 왓챠플레이에는 '노처녀'라는 해시태그로 특징화된 콘텐츠가 총 다섯 편이다. <미란다>를 보면 왜 이 콘텐츠에 '노처녀'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는지 알 수 있지만 굳이 이 태그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뭘까. 카테고리 중에 노처녀는 있지만 노총각은 없다. 미혼모는 있지만 미혼부는 없다. 노처녀와 미혼모를 다룬 콘텐츠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야기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다시 카테고라이징 되는 현실은 더 아쉽다. 

왓챠플레이의 <미란다> 특징 구분


앞서 <루머의 루머의 루머>와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로 십 대의 자아 형성기와 여성 프레임이라는 글을 썼다. <미란다>는 코미디 장르라 두 드라마와 무게가 살짝 다르지만 성장에 초점이 맞춰 있는 것은 유사하다. 결국은 십 대든 삼십 대든 나이 차이만 있을 뿐 여성의 내적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성장에 '여성 프레임'이 걸림돌로 혹은 반작용제로 놓여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교묘하나 혹독한 여성 프레임 


<미란다>는 '미란다'의 이야기이다. '미란다 하트'라는 배우가 자전적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고 직접 연출, 출연까지 했다. 배우 활동을 시작하고 아무도 캐스팅해주지 않아서 자신이 직접 각본을 써 기획했다고 한다. 다재다능한 배우. 미란다 하트는 성장기에 남들 보다 조금 튀는 외모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미란다>에 자신의 에피소드를 옮기면서 단순히 코믹함만 담은 것은 아니었다. 미란다 하트가 분명 의도한 것이라 생각하는 <미란다>의 불편한 지점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 <미란다>는 정말! 재미있는 시트콤이다. 엉뚱하고 순수한 매력을 가진 미란다도 그렇고 미란다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시청자와 눈을 맞추는 연출들도 재미를 더한다. 미란다 하트의 의도까지 알고 본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미란다 하트의 자전 에세이


<미란다>의 왓챠플레이 카테고리를 빌리자면 이 드라마의 특징인 #연애 #사랑 #노처녀이다. 

극 중 '미란다'는 서른네 살이고 결혼하지 않는 상태이다. 표면만 보고 '결혼하지 않은 삼십 대 여자'는 곧 '노처녀'라고 규정하는 것이 굳이 필요할지 의문이다. 오히려 연령으로 나눴으면 어땠을까 싶다. '#연애 #사랑 #성장 #삼십대'로. 삼십 대도 성장한다. 신체적 성장은 끝났어도 미란다처럼 관계를 맺고 잃고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배운다.(미란다는 정말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노처녀'라는 카테고리 영화들은 어떤 여성을 다루고 있나?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해서 카테고리를 저런 워딩으로 붙일 필요는 없다. '남자 없는' 반쪽짜리 인생? 결혼 후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않은 여자? 일반적인 트랙을 벗어난 문제 있는 여자? 워딩 하나에도 수많은 프레임이 담겨 있다.


<미란다> 배우들




미란다는 미란다로 시작해서


사실 <미란다>는 시즌1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불편한 지점이 많이 나온다. 이게 현실임을 지적한 것 같다. 미란다는 큰 키 때문에 종종 남자로 오해받는 것이나 'Sir'라는 호칭을 듣는 것에 익숙한 캐릭터이다.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미란다의 엄마는 딸을 결혼시키고 싶어 안달이 나 있고, 친구들마저 미란다의 외모를 희화의 대상으로 삼는다. '킹콩'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데 미란다가 보통 여성과 달리 키가 너무 크고 예쁘게 꾸밀 줄도 모르고 조신하게 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란다는 오랫동안 대학친구 '게리'를 좋아해왔지만 엄마와 친구들은 미란다가 그와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리'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란다를 여자로 보지 않을 거란 공공연한 시선들.


<미란다> 시즌1 에피소드1 _ 미란다 대신 공개구혼 중인 미란다의 엄마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제목은 <미란다>이다. '노처녀 미란다'나 '결혼 못 한 철없는 덩치 큰 여자'가 아니라 어떤 수식어도 정의도 필요 없이 '미란다'이다. 

어떤 콘텐츠이든 제목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그래서 <미란다>는 주인공 미란다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남자를 만나 모습을 바꿔가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잣대도 아닌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는 성장 말이다.



미란다인 채로 끝난다


<미란다>는 시즌3까지 방영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미란다가 두 남자에게 한 장소에서 동시에 프러포즈를 받지만 선택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장면으로 끝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두 남자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다). 후에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후속 에피소드가 따로 방영되었다고는 하나 <미란다>의 실질적 결말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미란다가 선택하지 않은 채로 끝난다는 설정이 좋았다. '노처녀' 콘텐츠의 전형성을 따르는 척만 했기 때문이다. 노처녀가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곧 해피엔딩인 것처럼 그리지 않았다. 선택이 남았고 그 선택이 미란다의 행복을 보장해주는지도 알 수 없다. 전형성에 익숙한 시청자라면(시청자를 그렇게 길들인 것은 미디어다.) 확고한 결말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란다>에는 이런 결말이 어울린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결국 '미란다' 그 자신이니까.




전형성을 경계하기


미란다를 보면서 '여성스럽지 않은 여자도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다면 한 번 바꿔 생각해보자. 미란다는 '여성스럽지' 않고 두 남자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여자 주인공은 여성스러운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야 한다'라는 전형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 전형성은 정말로 내면에서 생겨난 나의 가치관일까? 그렇지 않다. 가치관은 어떻게든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읽는 전형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야 한다. 자신만의 자아와 가치관을 형성하기도 전에 어디서 전형성이 비집고 들어왔는지 말이다. 자신을 규정하는 외부의 잣대를 경계해야 한다. 여자의 외모는 이래야 하고 대학-직장-결혼이라는 일반적인 트랙을 따라야 한다는 공공연한 사회적 가치관을 경계해야 한다. <미란다>가 말해주듯 삶과 선택에는 전형적인 정답이 없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을 뿐이지.


TV시트콤을 비롯한 예능이나 드라마 등은 가볍게 웃고 넘기는 콘텐츠이겠지만 무심코 주입되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TV는 바보상자'라는 오래된 비유는 이제는 좀 낡은 느낌이 난다. TV를 보면서 배우는 것들도 많아졌다. 게다가 이제 TV가 시청자를 대놓고 바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TV로 송출되는 콘텐츠는 TV 전원만 꺼버린다고 해서 차단되는 게 아니다. 여기서 TV는 곧 미디어일 텐데 이제 미디어는 더욱 똑똑해졌다. 교묘하고 조심스럽게 시청자의 의식을 조작할 수도 있다. 시청자의 비판적 감상이 없는 한 TV는 가치관이 전형적인 '카테고리'로 묶인 바보를 양산할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뒤집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노처녀' 같은 단편적 워딩으로 가치관을 범주화 한다면 다양한 생각의 가능성도 그 안에 갇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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