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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Jun 05. 2018

지금은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디트로이트>(2017)


캐서린 비글로우, <디트로이트>(2017) 2018.05.31 개봉


오늘 밤 버텨야 해

1967년 폭동으로 뜨거웠던 디트로이트 
알제 모텔에서 시작된 세발의 총성, 
그리고 세명이 죽었다.

피해자도 목격자도 모두 용의자였던 
그날 밤, 진짜 가해자는 누구인가


포털 사이트 영화 정보에 기재된 줄거리다. 짧고 강렬하게 잘 뽑았다.

메인 카피 "누군가 죽었고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역시 영화의 분위기를 집약한 느낌.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멋졌던 카피




캐서린 비글로우,

기억하게 만드는 이름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신작 영화 <디트로이트>(2017)가 개봉했다. 전작 <허트 로커>(2008)를 보고 이름을 외워두었던 감독이다. 그 영화 이후로 이 감독의 작품이라면 믿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최근작 영화 <디트로이트>를 보고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제로 다크 서티>(2012)는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 역시 많은 이들의 평이 그렇듯 수작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보고 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해두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허트 로커>를 보고 나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면 무척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러닝 타임 대부분 동안 관객을 쉬게 할 생각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그 강도를 점차 높여가기까지 한다. 서스펜스를 늘리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역시 보는 게 쉽지는 않다. 극도로 감정 소모가 되어 영화를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디트로이트> 러닝 타임은 143분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이니 만큼 각오를 하고 극장으로 향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아니 예상 보다 더 힘들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아주 섬세하고 끈기 있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면서 긴 러닝 타임을 이어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아주 사소한 부분 하나라도 결이 다르면 얇고 길게 이어지는 끈이 금새 끊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창작물의 완성도는 디테일이 결정한다. 창작자가 아주 사소한 부분에 대충 게으르게 작업 하면 완성도는 물론 작품성도 떨어지게 마련. 수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요즘 관객들은 영리해서 그 사소한 게으름도 간파할 수 있다. 대단한 작품들은 아주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쓴다. 그런 작품들은 단 한 군데도, 한 박자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연주를 한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런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이다. 플롯의 완벽함은 물론 큰 기둥과 잔가지 같은 연출을 모두 신경 쓰는 감독. 아주 작은 디테일에도 집착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언제나 관객에게 단순 관람 이상의 감정을 준다. <디트로이트> 역시 그랬다. 감독이 탄탄하게 빚어 놓은 긴장의 끈 위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긴장감을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곡예를 했다. 물론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가 긴박하기도 하지만 이를 어떻게 연출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긴박한 사건을 어떻게 긴박하게 스크린으로 옮기느냐는 감독의 역량이니 말이다.


캐서린 비글로우를 <디트로이트>로 처음 접하는 관객이라면 

분명 앞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1960년대 흑인음악, 그리고 래리의 음악


영화는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폭동이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알제 모텔에서 벌어진 실화를 다룬다.



1960년대 디트로이트에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심하고 제압하는 상황들이 빈번했다. 특히 디트로이트 경찰은 합법적인 파티에 모인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고 연행해 버린다. 불합리한 상황들이 지속되자 디트로이트에 거주하는 흑인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 흥분한 몇몇 시민들로 인해 폭동의 강도가 심해지면서 디트로이트의 모든 것이 마비되어 버린다.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던 디트로이트의 경찰들은 더욱 폭력적인 진압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한 사상자와 사망자까지 생겨난 상황. 건물 창가의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저격수로 의심 받아 무차별 총격을 받는 상황에서 알제 모텔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은 경찰은 물론 투입된 군인들까지 알제 모텔로 향하게 만들었다.




알제 모텔에서 장난감 총으로 장난스레 울린 총성을 저격수로 착각한 디트로이트 경찰과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알제 모텔을 포위한다. 알제 모텔 별관에 묵고 있던 투숙객들은 용의자로 몰리고 경찰은 그들에게 누가 총을 소지했고 누가 총을 쐈는지 말하라며 강압적인 수사와 폭력을 일삼는다. 그리고 세 발의 총성이 울리고 다음날 알제 모텔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 된다. 시신은 모두 알제 모텔에 투숙한 흑인 청년들.


이 사건에서 총을 쏜 용의자로 몰렸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래리'는 소울 음악 밴드 '드라마틱스'의 메인 보컬로 대스타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알제 모텔 사건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껏 폭행해도 되고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백인 경찰의 비합리적인 강압 수사. 뒷통수에 총구를 겨눈 자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보낸 끔찍한 시간. 그리고 그 폭행에 희생된 죄 없는 친구 '프레드'.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래리는 사건 이후 더 이상 노래하기를 거부한다. '드라마틱스'의 다른 멤버들이 대형 기획사와 계약을 따냈음에도 그는 밴드로 돌아가지 않는다. 흑인 밴드의 음악이 백인들을 춤추게 만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래리는 디트로이트의 한 교회 찬송가대에 지원한다. 래리의 화려한 이력 때문에 담당자는 부담스러워 하고, 그에게 왜 더 큰 시내 클럽에서 노래하지 않는지 묻는다. 래리는 답한다.


시내 클럽에는 백인들이 와요.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던 래리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살며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디트로이트 폭동 사건으로 염원했던 공연이 취소되면서 기획사의 눈에 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아쉬워 하던 래리. 폭동으로 모두 관객이 빠져 나간 빈 콘서트 홀에서 홀로 음악에 취해 노래를 하던 래리는 다시는 큰 무대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텅 빈 홀에서 노래하던 래리


영화에는 여러 주인공이 등장한다. 단 한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가 흘러가지 않고 굵직한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폭동과 억압의 서사가 옴니버스처럼 진행된다. 래리도 그 중심 인물 중 하나지만 그 중에서도 비중이 큰 편이다. 폭동 사건으로 인해 인생과 가치관에 큰 변곡점이 생긴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래리는 취소된 공연에 망연자실하며 취소의 원인인 폭동에 반감을 갖지만 다른 멤버들은 달랐다. 디트로이트 외 지역에서 왔던 그들은 폭동의 현실을 보고 '우리도 나가서 외치자'고 말한다. 래리는 폭동에 참여하길 꺼리며 밴드의 매니저 격인 '프레드'와 알제 모텔로 피한다. 폭동을 물 건너 불 보듯 하던 래리가 알제 모텔에서 사건에 휩싸이게 된 것.



사건 이후 래리는 완전히 바뀐다. 사건 전 그가 부르던 사랑 노래와 사건 후 부르는 찬송가. 두 곡에서 울리는 래리의 목소리 깊이가 다르다. 영화 마지막에 래리가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 되고 맨 마지막 신에는 래리가 화면을 응시하며 끝이 난다. 그의 눈빛이 너무 슬퍼서 영화가 끝난 뒤에 눈물이 터졌다.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소년의 꿈이 꺾이는 것도 그리고 그 꺾인 꿈을 누구도 보상해주거나 보듬어주지 않는 것도 서러웠다. 


개인적으로 1960년대 흑인음악을 좋아한다. 라파엘 사딕이나 레온 브릿지의 60년대 풍 음악을 좋아했는데 래리가 극 중에서 부르는 음악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 풍과 꼭 맞았다. 그저 리듬앤블루스 음악이 좋아서 듣곤 했던 60년대 흑인음악에 래리와 같은 사연이 모두 녹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흑인들은 누구를 위해 노래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볍게 리듬을 타며 들을 수가 없었다. 





구토로도 게워지지 않는


알제 모텔 사건 직후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오히려 지역 보안관으로 있다가 사건을 조사하는 군인들과 동행했던 '디스무케스'였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억압 받는 사람들 중에서 특권이 주어지는 몇몇은 그 무리에서조차 외면 당한다'고 말한다. 


'디스무케스'는 폭동의 선두에 서지 않고 백인의 비위를 맞춰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풀어보려는 성격의 인물이다. 우직하고 신념이 강하지만 이를 위해 뻔한 손해를 보는 것은 피할 줄 아는 합리적이고 영리한 인물. 그는 폭동에서 경찰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흑인들을 잘 타일러 다치지 않게 돌려보내기도 한다. 그런 그인 만큼 알제 모텔 총격을 듣고 출동하는 군인들을 따라 나서고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알제 모텔에 투숙 중인 흑인 청년들에게 "오늘 밤은 버텨야지"라며 경찰들을 잘 달래 살 길을 찾자고 제안하는 인물도 바로 디스무케스다.



그러나 알제 모텔 사건 이후 디스무케스는 알제 모텔의 흑인 청년 셋을 사살한 용의자로 지목 받는다. 목격자들의 잘못된 진술이 교차되면서 엉뚱한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고, 디스무케스는 선의를 위해 한 행동이 낳은 결과에 망연자실한다.

 


사건 현장에 있던 일부 경찰의 진술이 나오면서 죄 없는 시민을 사살한 경찰이 죗값을 치르는가 했더니 그렇지 않았다. 사건 이후 알제 모텔 사건의 판정이 진행되지만 백인 경찰들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디스무케스 역시 용의 선상에 올랐으나 무죄로 풀려난다. 법적인 절차가 진행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증인으로 참석한 알제 모텔 사건 생존자들 역시 흑인이라는 이유로 강압적인 질문을 받았고 죄 없는 디스무케스도 당연히 용의자로 몰렸다. 디스무케스는 판결 이후 승리의 쾌감을 느끼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 백인 경찰들의 모습을 보고 재판장을 뛰쳐나와 구토를 한다. 희생자 유족들의 비통함은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구역질 나는 상황.



디스무케스는 알제 모텔 사건 이후 가장 크게 가치관의 혼란을 겪은 인물이다. 폭동에서 최대한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흑인은 물론 필요할 땐 백인도 도왔던 그였으나 사건 이후 자신의 행동이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함을 깨닫는다. 실제로 디스무케스는 억울하게 수감되었던 것임에도 오히려 흑인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아 교외로 이사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도.


<디트로이트>를 지금 우리 사회로 가져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선을 긋고 차별하는 행태는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도 변함이 없는 인간의 추악한 행태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군가 죽었고 누구도 죽이지 않은" 상황은 일어나고 있다. "총성은 있고 총을 쏜 사람은 없는" 상태에서 '확실한 가해자'를 만들어내는 조작의 상황도 현재진행형이다.


<디트로이트>를 보고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울었던 것은 그래서이기도 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서. 백인 경찰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심이 끝난 후 '디스무케스'가 구토를 하는 장면과 교회에서 노래하는 '래리'가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지만 그 장면이 진짜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건이 1967년 미국에만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완벽히 달라졌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이름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는 영화였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미국 현지 개봉 포스터는 물론 국내용 <디트로이트> 포스터도 인상적이다.


폭동 현장의 긴장감을 표현한 국내 포스터


미국 개봉 당시 포스터. 사건 이후 죄 없이 연행되는 디스무케스(존 보예가)의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이 압권.
미국 개봉 당시 현지 포스터. 이미지와 타이틀을 세로형으로 과감이 가로를 넓히면서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현장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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