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수식을 달고 싶지 않다.
작년 연말 겨울, 서울 3호선 지하철 플랫폼. 퇴근 시간이라 역사는 붐볐고 먼지와 쇠가 뒤섞인 듯한 냄새가 풍겼다. 연말은 더 이상 행복하기 만 한 시기는 아니었다. 이룬 것 없이 끝나가는 한 해,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사람들의 어두운 옷차림과 그걸 닮은 표정들. 그저 그런, 침침한 겨울의 어느 날. 지하철역 스크린에는 개봉을 앞둔 영화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연말에 기다렸다는 듯 개봉하는 그저 그런 영화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또 한국영화, 또 식상하게 남자 배우들만 나오는 영화겠지. 그 영화는 얼마 후 개봉했고 나는 보러 가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지났다. 올해 봄에 그 영화를 보게 됐다. 극장 상영이 끝난 후 VOD로 볼 수 있게 되자 영화를 봤던 친구가 꼭 봐야 한다며 같이 있는 자리에서 영화를 틀어버렸다.
"감독이 누군데?"
"장준환."
영화를 자주 만드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만들면 제대로 만드는 감독, 기억 속의 장준환은 그런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를 인상 깊게 봤던 터라 조금은 기대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대한민국의 1987년을 그리고 있었다.
1987년. 교과서에서 밑줄 쳤던 그 1987년.
두 열사의 이름에 형광펜을 쳤던,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
그렇게 인쇄된 텍스트로만 건조하게만 기억되었던 1987년.
그 1987년이 영화로 되살아나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나 소설을 접할 때 거기서 다루는 감정에 너무 깊이 공감해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지나치면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사물 하나에도 감정을 쏟아부어서 한번 손에 든 물건이면 도통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인간관계는 더욱 힘들어서 처음부터 인연을 깊이 맺지 않는 습관도 있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배려하는 바람에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진이 빠져 버린다. 공감능력이란 것도 정도 조절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나 같은 경우는 강약이 없다. 일단 켜지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빠져서 한참을 추스러야 한다. 그러니 애초에 너무 감정이 격해질 것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겁이 나니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영화면 충분하다. 그 이야기는 끝이 있으니까. 그래서 현실은 더 다루기 힘들다. 인간관계에 회의적인 사람이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영화 <1987>을 보고 나서 한동안은 몇몇 장면에 사로잡혀 힘들었다. 단순히 책을 덮고 영화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끝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7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곁에 있었고 그때의 그 장소도 그대로였다. 영화 속 장면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흘렀고, 오래도록 감정을 추스르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쓸 때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울다가 잠들었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는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학창 시절 사진이 함께 나왔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을 텐데, 아직도 앳된 얼굴을 하고서.
특히 박종철 열사를 연기한 배우 여진구의 연기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 차가운 남영동 고문실에서 엄마를 떠올렸을 젊디 젊은 그를 생각하니 목이 막혀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가 물고문을 당하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엄마'를 웅얼거리는 장면은,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박종철 열사에 대한 연민이 가득 담긴 장면이었다. 그가 사망한 뒤 가족들이 당한 수모는 또 어떤가. 정확한 사인도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를 수 없었던 그날의 현실은 답답하고 분하기만 했다.
영화는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으로 시작된 발단부터 이를 은폐한 사람들과 밝히려는 사람들,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이한열을 비롯한 학생들과 수많은 국민들까지. 그리고 얻어낸 직선제 개헌. 이 과정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너무 치우치지 않고 1987년을 확실하게 읊어낸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대한민국은 쉽게 얻어낸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 일상 속 자유나 권리조차도 우아하고 고상하게 얻어낸 것이 아님을.
그리고 또 생각하게 한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1987년에 내가 대학생이었다면 나는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을까. 재작년 겨울 종로로, 광화문으로 촛불 집회에 참여하면서도 어렴풋이 생각을 했었다. 폭력적인 그 시대의 학생운동에 나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놀랐다. 다만 그럴수록, 무자비한 진압이 난무하던 때에 앞장서서 집회를 시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겸허해졌다.
남영동에는 박종철 열사 기념관이 있다. 물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했던 그 장소를 소름 끼치게도 그대로 보존해 놓고 있다. 방문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차마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신촌에는 이한열 열사 기념관이 있다. 거기엔 그가 신었던 운동화 한 짝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는 사진 속 그는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다. 바로 그 신발이 지금도 그대로 신촌에 있다.
영화 <1987>은 2017년 12월 27일 개봉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던 1987년 1월로부터 고작 30년이 흘렀을 뿐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본 관객 수는 총 7,231,856명(영진위). 70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어떤 울림을 주었을까. 영화가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영화에서 김태리 배우가 연기한 '연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는 삼촌(유해진 분)에게 소리친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 삼촌은 답한다. 그럼 사람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느냐고.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왔다.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느냐고 그런다고 뭐가 바뀌느냐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이 바꿔왔다.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에는 오늘날이 영화나 다른 콘텐츠에서 어떻게 그려질까 궁금하다. 가만히 있는 세대로만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요즘 내가 무얼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까.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가 김숨이 쓴 <L의 운동화>를 읽었다. 이한열의 운동화 한 짝을 복원하는 복원가의 시점으로 마치 이한열을 복원해내듯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운동화 고무 밑창의 바스러진 가루를 하나하나 이어 붙이듯 섬세한 표현과 문장들 덕분에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L의 운동화>에는 교과서에서나 영화에서 접한 것 말고도 몰랐던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피격당했던 그날, 그가 수업에 가지 못할 만큼 아팠음에도 집회에, 그것도 맨 앞에 서서 참여했다는 사실과,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옷을 스스로 벗었을 만큼 의식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들도. 그가 신고 있던 그 운동화 한 짝을 품에 고이 들고 왔던 한 여학생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것도 소설 덕분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한 짝의 행방을 가늠해보는 것도. 그 운동화를 신고 수업을 듣고 집회에 나섰을 그, 고향집을 찾아 부모님을 안심시켰을 그, 운동화 한 짝에 담긴 그의 젊음, 그 젊음을 앗아간 현실. 그리고 그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그 운동화는 버려진 지 오래였을 테고, 대신 중년 아저씨 이한열이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평범하게 살아갔을 거라는 생각들까지도.
고작 운동화 한 짝을 가지고 무슨 할 얘기가 많겠냐마는, 사물 하나에도 풍부하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래된 운동화의 닳은 뒤축을 보고도 눈물을 훔치는 법이다. 그래서 기념관은 방문하는 사람에 따라 '기념'의 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 김숨 소설가 역시 그랬을 것이다. 복원된 운동화를 보고 거기에 응축되고 기록된 수많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펜을 들게 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L의 운동화> 맨 앞장은 이렇게 쓰여있다. "L을 기억하는 모든 분께"
1987년 6월 9일, 집회가 열리던 그곳에는 천여 명의 학생이, 따라서 이천 개의 발들이 운집해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 이천 개의 발들은 분주히 흩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L의 왼발에서 볏겨진 운동화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듯 발들 속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자신의 왼발에서 운동화가 벗겨질 때, L은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나처럼 허물이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벗겨진 운동화를 다시 신으려고 L은 허둥거렸을까.
단발이거나 긴 생머리이거나 어색하게 파마를 한 여학생이, L의 운동화를 주워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새를 주워 드는 심정으로 L의 운동화를.
여학생의 손이 뻗어 와 혼비백산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순간, L의 운동화는 구원의 손길을 만난 듯 안도했으려나. (59쪽.)
L은 걸을 때 왼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오른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쫓기듯 재게 걸었을까? 보폭을 크게 해 성큼성큼 걸었을까? 걸을 때 발가락에 더 힘이 실렸을까, 뒤꿈치에 더 힘이 실렸을까?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 주고는 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은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80쪽.)
L의 운동화는 대량 생산된 기성품이었지만 특별히 '선택'되었다. 뒤샹 같은 특정한 예술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 '시민'에 의해서. (83쪽.)
"오늘 낮에 L의 운동화를 주웠다는 이를 만났어요. 뜻밖에도 제 지인의 친구분이었어요. 여자분으로, 자신도 그날 L이 피격을 당하던 현장에 있었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부축해 가는 L의 발에서 떨어진 운동화를 자신이 주웠다고요. 운동화를 찾아 주려고 병원까지 따라갔다고 했어요. 나아서 집에 가려면 운동화가 있어야 할 텐데 싶어서요. 운동화가 있어야 그것을 신고 집에 갈 텐데 싶어서…….
그 여자분은 L이 나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L과는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이라고 했어요. 운동화를 아무에게나 줄 수 없어서 손에 꼭 들고 있었대요. 밤 11시가 넘도록 운동화를 손에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드렸대요.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신문에서 L의 운동화를 복원한다는 기사를 읽고 무척 놀랐대요. 그날 병원 응급실까지 따라가 집에도 못 가고 기다리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드린 운동화가, 신문 한 귀퉁에 실린 L의 운동화가 맞나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했어요."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 운동화가 있어야 집에 갈 텐데 싶어서 L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운동화를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서 있었던 마음, 그 마음이 지난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 준 게 아닌가 싶어서. (270~271쪽.)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 준 마음.
앞으로 더 버틸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더 보태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