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지도가 쓸모없어질 때

비로소 만나게 된 아름다운 세상

by 테오 진

"인간이 그린 지도가 끝나는 곳에서, 우주는 비로소 제 속살을 보여주었다."




현지인의 투박한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무작정 핸들을 꺾었을 때 우리는 길을 잃었고, 지도는 더 이상 우리를 안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지도가 결코 가르쳐주지 않았던 은하수를 만났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친구와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여행이 어그러졌을 때, 우리는 '포기'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패잔병의 회군에 올랐다. 비포장 도로의 덜컹거림은 우리의 실망감을 부채질했고, 우리는 서로를 탓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 멈춰 선 황야는 적막했고, 우리가 가진 지도는 이제 휴지 조각보다 가치 없었다. 완벽한 실패라고 생각했던 차 안에는 지독한 침묵만이 흘렀다.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계획이 망가진 자리에는 어둠뿐인 듯했다. 그 순간, 고개를 들자 은하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AZuwhfbtcr9a0QDufNkcyw-AZuwhfbtNCY5zlIrOc-WSw.jpg 어둠이 걷힌 자리의 은하수


지도 위에 길을 그리던 인간의 오만을 비웃듯, 우주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길이 끊긴 곳에서 마주한 은하수는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빛의 강줄기는 길 잃은 존재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였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을 그 온기가 감싸 안았다.


지도라는 종이 조각이 쓸모없어진 그 절망의 순간에야, 인간이 만든 선(지도)이 끝나는 곳에서 우주의 면(은하수)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주는 비로소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따뜻한 속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이름 없는 황야 위에서의 조우였다.


실패가 선물로 바뀐 우즈베키스탄의 밤처럼, 러시아의 끝없는 설원에서도 예기치 못한 축복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내비게이션은 고장 난 시계처럼 '1,000km 직진'이라는 숫자를 붙들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뜬 "1,000km 직진 후 좌회전"이라는 낯선 안내를 보며, 우리는 오직 오로라라는 목적만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에 닿기도 전, 정처 없이 흘러가던 길 위에서 우리는 오로라보다 먼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경을 만났다. 눈 덮인 자작나무 숲 위로 내려앉은 파란 새벽빛은 숨을 멎게 했다.


20200216_131937.jpg 오로라보다 빛나는 새벽의 숲 - 러시아


마침내 하늘 위로 초록빛 오로라가 일렁였을 때,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은 오로라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나기 위해 견뎌온 그 막막한 '직진의 시간'들이었음을.


오로라 - 무르만스크


계획이 어긋났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그 빈자리를 채우는 우연한 아름다움 사이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1,000km를 직진해야 하는 막막한 길 위에서 나는 배웠다.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시야는 비로소 넓어지고,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현재의 공기가 비로소 피부에 닿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지도'는 때로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우즈베키스탄의 은하수와 러시아의 새하얀 세상은 내게 속삭였다. 불확실한 내일을 설계하느라 오늘을 희생하기보다, 지금 내 발 밑의 흙과 머리 위를 스치는 바람에 집중하라고.


진정한 만족은 찾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비워낸 자리에 스스로 찾아오는 손님 같은 것이었다.




다음 이야기 : Ep.8 핸들을 놓는 용기 – 비로소 시작된 항해.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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