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용기

배경이 아닌 주인으로

by 테오 진
"진짜 여행은 검색창을 닫고, 베개 밑에 숨겨둔 날 선 의심을 거두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세상이 찬양하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들의 리스트는 대개 자본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이었다. 명성에 걸맞은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그 안으로 들어설 때면, 나는 감동보다 지독한 허무를 먼저 마주하곤 했다. 사람들에 밀려 줄을 서고, 정해진 포토존에서 셔터를 누르는 행위. 박제된 아름다움 앞에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예약된 감탄사는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나는 내가 그 풍경의 주인인지, 아니면 그저 풍경의 배경인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의 감탄사를 복제하는 여행은 나를 점점 무채색으로 만들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유랑이 아니라, 누군가 설계한 루트를 복습하는 숙제에 불과했다.


내 오만과 편견이 가장 극명하게 깨진 곳은 이란이었다. 세상이 내게 가르쳐준 이란은 '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뉴스 속의 그곳은 늘 차갑고 위험한 무채색이었기에, 조지아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이란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조차 내 안의 의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은 두려움보다 힘이 셌고, 나는 아르메니아를 거쳐 타브리즈로 향했다.


국경을 넘자마자 마주한 것은 읽을 수 없는 지렁이 같은 문자와 기호 같은 숫자들의 나열이었다. 세상에 처음 눈을 떠 모든 것이 생경했던 유년의 기억 저편으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터미널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가이드북이 아니라 낯선 이란인의 투박한 손길이었다.


"손님은 신이 보낸 선물이다."


낯선 이란인은 갈 곳 없는 나를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사실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예약 애플리케이션조차 작동하지 않는 고립된 땅에서, 그의 제안은 유일한 생존 줄이었다. 하지만 고마움보다 앞선 것은 공포였다. '적'의 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는 생각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는 귀한 양고기를 구워 내어 주며 정성껏 저녁을 대접하고 잠자리까지 내어주었지만, 나는 끝내 긴장을 풀지 못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나는 주방에서 작은 칼 하나를 몰래 가져와 베개 밑에 숨겼다. 언제든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망상과 날 선 경계심이 나를 짓눌렀다. 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확인하며 겨우 눈을 붙였던 그 밤, 나는 이 땅의 환대보다 내 안의 편견을 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나를 깨운 것은 위협이 아니라 갓 구운 빵 냄새와 나를 향해 짓는 무해한 미소였다. 베개 밑에 숨겨둔 칼이 무색해질 만큼 투명한 그들의 눈동자 앞에서, 나는 비로소 무력해졌다. '적'이라 규정했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잔인하고 얄팍한 것이었는지. 이름 없는 돌산을 함께 하이킹하고, 쏟아지는 별빛 아래 사막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나는 비로소 베개 밑이 아닌 마음속의 칼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내 안의 칼을 거두고 나니, 가이드북에는 결코 담기지 않았던 이 땅의 진짜 표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나라의 정수를 담았다는 대표 명소 뒤편에는 그것을 압도하는 풍경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랜드마크라는 이름표를 떼어내면, 그 땅은 훨씬 더 광활하고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도를 접고 현지인의 거친 손등이 가리키는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야, 비로소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빵 굽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인 광장의 소음 속에 진짜 그 나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행의 계획을 미리 구체화하지 않게 되었다. 가이드북이나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들은 결국 외부자의 시선으로 필터링된 ‘남들이 본 것’의 복사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땅에서 태어나 흙을 밟고 자란 이들의 감각을 외부인의 정보가 앞지를 수는 없다. 나는 도착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들고 있던 지도를 접어 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대신 현지인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눈동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튼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이 단순한 질문은 수만 원짜리 티켓보다 훨씬 값진 풍경으로 나를 안내했다. 현지인들의 추천을 따라 걷는 길은 늘 예상치 못한 선물로 가득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단순히 장소를 소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었다. 함께 정보를 묻고 답하며 친해진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는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있는 '삶' 자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르쳐준 것은 지형지물이 아니었다. 이 땅의 바람이 어느 계절에 가장 향기로운지, 어떤 나무 아래에서 쉬어야 가장 달콤한 낮잠을 잘 수 있는지 같은, 오직 그 땅의 주인들만이 아는 은밀한 비밀들이었다. 외국인이 만든 정답지 대신 현지인의 투박한 진심을 따라갈 때, 여행은 비로소 여행자에게만 허락된 '속살'을 보여준다.


나는 비로소 가이드북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오늘도 가이드북 대신 그들의 목소리를 지도로 삼아, 이름 없는 로컬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다음 이야기 : Ep.7 지도가 쓸모없어질 때 – 비로소 만나게 된 아름다운 세상.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매주 수요일 아침 10시에 배달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Ep.5 삶이라 믿었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