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삶이라 믿었던 무게

경계심의 크기

by 테오 진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법만 배우느라, 정작 그것을 부리는 법은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방 한구석, 먼지 쌓인 70L 배낭이 허물을 벗어놓은 짐승처럼 엎드려 있다. 7년의 유랑을 함께하며 내 척추를 짓누르던 그 육중한 짐승은 이제 바람이 빠진 채 납작하게 숨을 죽이고 있다. 어깨를 짓누르던 그 육중한 무게는 나를 지탱해 주던 힘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가두던 성벽이었을까. 삶이라 믿었던 70L의 무게가 사실은 내게서 하늘을 앗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수없이 많은 날, 소년은 저 배낭과 함께 길 위에 버려지곤 했다. 열 시간 넘는 여행 끝에 낯선 간이 정거장에 내려서면, 먼지 섞인 공기가 폐부로 들이닥쳤다. 소년은 땀에 절어 축 처진 몸을 일으켜 다시 배낭을 둘러멨다. 어깨끈이 쇄골을 파고드는 형틀처럼 조여올 때마다 소년의 고개는 땅으로 처박혔고, 시선은 겨우 발끝이 딛는 흙바닥에 고정되었다. '이것만 없으면, 이 무게만 버릴 수 있다면 더 멀리, 더 가볍게 날아갈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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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짊어진 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리고 싶어도 차마 버리지 못한 고집스러운 자존심이자, 무거울수록 더 먼 곳까지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삶의 불안이었다. "배낭 속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예비 품목들이 가득했다. 낯선 곳에서 나를 증명해 줄 걸로 믿는 서류뭉치들, 돌아오는 계절을 위한 옷 가지들이 배낭의 무게를 더했다. 그것들은 단순한 예비 품목들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경계해 쌓아 올린 방어기제였다. 배낭의 무게는 곧 내가 타인과 세상에 대해 가졌던 경계심의 무게와 같았다." 소년은 스스로 만든 무게에 짓눌려, 하늘을 나는 법을 잊은 채 굽은 등으로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제 소년은 안다. 삶의 무게는 억지로 버티며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에서 가벼워진다는 것을.


어느 해 질 녘, 낯선 숙소의 침대 옆에서 배낭의 버클을 '탁' 하고 풀어내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깨를 누르던 거대한 기압이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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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노을이 물드는 하늘의 빛깔을 보았다. 굽어 있던 허리를 펴자 비로소 곁에 있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의 흔들림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텅 빈 가방 속으로는 무거운 짐 대신, 고요하고 투명한 평온의 공기가 차올랐다.


비우고 내려놓은 자의 어깨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가벼워진 몸으로 걷는 일상의 산책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선물인지.


무거운 짐을 끝까지 짊어져 본 자만이 내려놓음의 해방감을 알 자격을 얻는다.


나는 이제 시계를 풀 듯 배낭을 부린다. 그리고 나만의 엇박자로 흐르는 시간 속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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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 : Ep.6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용기 - 배경이 아닌 주인으로.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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