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게 묶인 운명이라는 이름의 매듭
“그렇게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자라난 소년은, 이제 세상에 대한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낡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손가락으로 그 위를 더듬던 소년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소년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도 속의 소음을 상상하곤 했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는 묘한 승부욕과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소년은 세상의 온갖 틈새를 비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익숙한 안방의 정적 속에만 머물러 있으면, 소년의 영혼은 투명한 무채색으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어 스스로를 새로운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 넣었다. 낯선 언어가 고막을 때리고, 이름 모를 향신료의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찌를 때마다, 소년 안에서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새로운 나’의 색깔들이 피어올랐다.
그 무모함이 정점에 달했던 순간은 호주의 푸른 바다 위였다. 내 앞에는 눈이 시릴 만큼 눈부신 산호초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수영이라곤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물 공포증을 간직한 소년에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색은 공포 그 자체여야 했다. 하지만 그날,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유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강렬했다.
숨이 턱 막히는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쌀 때, 소년은 비로소 깨달았다. 발이 닿지 않는 허공에 몸을 맡긴 채 거칠게 물을 가르는 동안, 내 안의 ‘두려움’은 ‘경이로움’으로 그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산호초 사이를 유영하는 형형색색의 생명들을 마주하며 소년은 처음으로 웃었다. 물 밖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던, 오직 물에 빠져 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생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길 위에서 깨달은 삶의 감각은 비단 이런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의지와 무모함만으로 세상을 다 빚어낼 수 있다고 믿었을 때, 운명은 예기치 못한 질문을 던져왔다. 아르헨티나에서 월드컵의 열기를 품고 브라질로 향하던 길, 나는 한 벨기에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아이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 선천적인 다름을 안고 이 세상에 존재함에도, 그 소녀의 천사와 같은 미소는 그녀의 다름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존재 자체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 눈부신 미소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운명이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세상은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가.
생명을 가지는 시기와 환경에 따라 그 존재의 가치가 미리 정해지는 것일까.
태어나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건 뭐든지 가져 볼 수 있는 인생과,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가진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의 차이를 고민하며 사는 삶.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어 더욱 조여 오는 매듭, 그것이 운명이었다.
우리는 생명으로 존재하게 된 이 순간부터 수많은 매듭으로 연결된 실타래를 만들어간다. 어떤 매듭은 꼬여버려 영영 풀 수 없을 것만 같고, 꼬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매듭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죄어온다. 만약 시간 여행이 가능해져서 과거의 일을 바꾸고 내가 태어날 환경을 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서 마주하는 햇살의 따스함과 달빛의 서늘함을 지금처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결국 진정한 배움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끝에 있지 않았다. 거친 배낭의 끈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의 매듭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온몸의 감각을 세상에 직접 부딪쳐보는 일 속에 있었다.
아무나 값을 매길 수 없는 고유한 무게의 경험들.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도 타인의 깨달음을 내 것으로 온전히 이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만든 매듭들에 조여진 순간들조차 결국 나의 삶을 더 단단하게 제련해 주었음을 이제는 안다.
배낭 하나에 온 세상을 담아보았던 그 유랑은 나라는 범위를 확장하는 가장 정직한 열쇠였다. 오직 내 발로 딛고 서서 풍경을 담아내고, 주어진 운명을 내 것으로 빚어낼 때 비로소 나는 '진짜 나라는 공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빚어내야 할까요."
다음 이야기 : Ep.5 삶이라 믿었던 무게 - 경계심의 크기.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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